북핵문제에 관한 2ㆍ13 합의 이후 한미 양국의 고위 외교 당국자 사이에선"이제 앞으로 경계해야 할 것은 북한 핵 문제가 정치화하는 것"이라는 얘기가 오간 적이 있다고 한다. 양국 모두 대선이라는 큰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시기인 만큼 각자의 국내 정치가 북핵 문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자는 의견 교환이자 다짐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 한미 모두 대선의 영향 커져
미국측이 먼저 이런 말을 꺼냈다는 것이고 보면 미측으로선 아무래도 자신들보다는 한국의 '과속'가능성을 더 염려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결과적으로 지금 한국의 상황을 보면 미측의 우려가 괜한 기우였다고 말하기는 어렵게 됐다. 한국에선 이미 북핵 해결에 대한 장밋빛 기대를 바탕으로 판문점에서의 남북미중 4개국 정상회담 개최를 주장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또 실현 가능성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각종 북한관련 공약들이 우후죽순처럼 불거져 나오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태세다. 그렇다고 해도 다른 한편으로 보면 북한 문제와 관련된 한국의 과열 양상은 선거철마다 되풀이돼온 것이어서 사실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나아가 이러한 법석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양자협상을 최우선시하는 북한의 행동에 미치는 실제 영향력은 미미하다는 점에서 한국의 상황은 미국의 우려만큼 대수로운 일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미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북핵 문제 대처에 있어서의 정치화 경향은 사정이 좀 다르다. 미국의 변화가 곧 협상에 임하는 북한의 태도 및 전술에 직접 영향을 미쳐 실질적 차이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2ㆍ13합의 이후 정치적 의욕과잉에 빠져들고 있다는 강경파의 비판은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외교분야에서 성과를 내는 데 조급해 하고 있다는 지적과 맞물려 있다. 부시 행정부의 국내 정치적 필요가 미국의 다음 행동을 결정하는 핵심요인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그러나 미국이 가시적 성과에 목말라 하면서 정치적 목적에 압도돼 간다고 해서 그것이 당장 북핵 협상 전체에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만은 또 아니다.
오히려 현재까지는 여러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긍정적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강경파는 원칙의 훼손이라고 비판하지만 마카오 은행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자금 문제해결은 미 협상파가 무리다 싶을 정도로 정치적 의지를 앞세웠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6월말에 이뤄진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의 갑작스러운 방북은 북미 양자협상의 중요한 계기였다기보다는 실은 북한이 연출한 정치적 이벤트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힐 차관보의 방북은 북한의 초청을 조건을 내세워 마다하지 않고 응했다는 점에서 양측의 신뢰조성에는 도움이 됐다고 봐야 한다.
● 또 미봉으로 끝난다면 큰 문제
문제는 앞으로도 이러한 긍정적 요소들이 부정적 효과들을 극복하는 역동성을 계속 발휘할 수 있을지가 매우 불투명하다는 데 있다. 북한이 확보한 플루토늄의 양이나 핵무기 수, 고농축우라늄 보유 여부 등 북핵 협상의 근본적 핵심에 접근해갈수록 우려는 더 커진다.
일례로 힐 차관보는 북한의 플루토늄 보유 추정치를 50~60kg이라고 거듭 밝히고 있는데 이는 그 정도만 밝히면 된다는 정치적 가이드라인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부시 대통령의 임기에 쫓겨 진행되는 정치화 경향이 북한핵의 근본적 해결이 아닌 미봉책의 수용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결국 그것은 우리에게 또 다른 진퇴양난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워싱턴=고태성특파원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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