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권병현 전 대사의 한중수교 비망록] <5> 북한의 반응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권병현 전 대사의 한중수교 비망록] <5> 북한의 반응

입력
2007.07.09 00:11
0 0

한중수교가 북한에 엄청난 충격을 준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북한은 대외적으로나 공개적으로나 한중수교를 반대하지 않았다. 심지어 겉으로는 중국을 일체 비난하지 않았다.

1990년 9월30일 한국이 옛 소련과 수교를 하자 공개적으로 엄청난 비난을 쏟아내던 태도와는 아주 대조적인 자세를 취했다. 북한은 중국이 3단계에 걸쳐 한중수교협상 진행과정을 알려줌으로써 충격을 어느 정도 흡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북한지도층은 내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를 안으로 삭이느라 내상이 심각했던 것이다.

북한은 한중수교 발표 후 중국과의 국경지대에서 통제조치를 강화했고 중국인 관광객의 입국을 금지시키면서 한두 달 뒤 서서히 직장단위나 학교 등을 통해 한중수교 사실을 유포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한중수교 하루 전인 8월 23일 '강고한 정신으로 인민의 위엄과 영광을 빛내자'라는 제목의 노동신문 사설을 통해 주민들에게 '우리식 사회주의를 지키자'고 촉구했다. 수교 다음날인 8월25일에는 노동신문 사설을 통해 미국과 북한간의 관계개선을 제의하였다.

북한은 1989년 6월 텐안먼(天安門)사태에 대한 중국의 조치에 지지를 표명했다. 그해 11월 김일성 주석은 중국을 방문, 텐안먼 사태로 국제적으로 고립감을 느끼던 중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덩샤오핑(鄧小平)옹과도 만났다.

김 주석은 한중수교 전까지만 해도 매년 한 두 차례 베이징을 방문, 중국과 정상회담을 갖는 관례를 지켜왔다. 김 주석의 정기적인 중국방문은 양국 관계가 그만큼 돈독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1990년에 접어들면서 북한은 한국과 중국의 관계에 촉각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김 주석은 베이징아시안게임을 앞둔 9월11일 중국을 급거 방문, 선양(瀋陽)에서 장쩌민(江澤民) 총서기 등과 회담을 가졌다.

의전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주의국가 간 정상회담이 수도가 아닌 지역에서 이뤄졌다는 것 자체가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북한이 한반도를 둘러싼 대내외 정세의 변화에 절박한 심정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한 것이었다.

실제로 9월2,3일 세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이 평양을 찾아 한소관계에 대한 입장을 설명했다. 게다가 그 해 유엔총회기간 중 뉴욕에서 한소외무장관회담이 열린다는 사실은 북한의 입장을 다급하게 만들었다.

1991년 11월에도 김 주석은 중국을 방문, 덩옹을 만났는데 당시 김 주석의 가장 큰 우려의 시나리오는 한중수교였을 것이다. 그 직후 덩옹이 김 주석에게 모종의 약속을 해주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로부터 불과 몇 달 후 이뤄진 한중수교는 김 주석과 북한으로 하여금 중국과 덩옹에 대해 적지 않은 배신감과 불신감을 갖도록 해주었을 것이다.

1991년 11월을 마지막으로 김 주석은 매년 한 두 번씩 방문하던 중국에 발을 끊었다. 한중수교 시점과 전후관계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김정일이 후계자로 들어선 후부터 2000년 초까지 중국과 북한은 최고지도자간 교환방문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중국측의 접근도 이뤄지지 않았다. 북한과 중국의 지도자 교환의 공백기가 한중수교 이후 약 8년 간 이어졌다.

중국과 북한 간 최고지도자의 교환이 중단되면서 소위 '혈맹관계'가 자연적으로 소멸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북한은 한중수교 이듬해인 1993년 3월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고 은밀히 독자적인 핵개발정책으로 전환했던 것은 그 후에 밝혀진 일이다. 한중수교는 북한의 핵개발을 둘러 싼 매우 복잡한 정세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한중수교 후 한동안 중국인의 속마음을 양파에 비유한 의미심장한 얘기가 나돌았다. 즉 중국인의 속마음은 양파처럼 겹겹이 감춰져 있는데 보통 외국인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양파껍질로 단순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반면 어지간한 중국전문가는 한 겹 안까지, 최고 중국전문가는 두 겹 안까지만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김일성 주석은 1930년대부터 중국대륙을 무대로 항일 빨치산투쟁을 하는 등 평생을 중국인과 생사고락을 같이 해왔고 매년 최고지도자들과 교류해왔던 터라 누구보다 중국인의 속마음을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해왔다.

그럼에도 김 주석 자신도 중국인의 양파 같은 속마음을 세 겹 안까지만 들여다 볼 수 있을 뿐, 그 안에 몇 겹이 더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다는 얘기였다. 한중수교가 중국의 대 북한, 특히 김 주석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어려운 결단이었는가를 풍자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한중문화청소년협회(미래숲) 회장

ⓒ 한뭬팀甄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