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발표된 ‘국책은행 역할 재정립 방안’의 실제 내용은 제목과는 반대로 재정립이 필요 없다는 선언이다. 산업은행의 경우 자회사인 대우증권을 매각하지 않고 산업은행의 투자금융 업무까지 이관받아 투자은행(IB)으로 키운다고 한다. 또 기업은행은 중소기업금융 전문은행으로서 장기적으로 민영화를 추진하기로 했다.
국책은행 개편이 요구되는 이유는 방만하고 중복된 기능들을 통폐합하고, 설립 목적을 달성했거나, 민간이 더 잘 할 수 있는 기능은 민간에 넘겨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그러나 발표된 개편안은 이런 취지를 어느 것 하나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개편안은 우선 산업은행의 5개 자회사를 매각하라는 지난해 감사원의 권고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감사원은 국책 은행들이 설립 목적을 벗어나 업무영역을 확대하면서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민간영역을 침해하고 있다며 역할 축소를 요구했다. 그러나 개편안은 자본시장통합법 통과로 투자은행을 육성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자회사를 오히려 키우기로 했다.
금융산업을 선도할 투자은행을 육성할 필요성이 있고, 산업은행이 이 분야에서 민간은행을 능가하는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도 맞다. 그러나 골드만삭스 같은 세계적 투자은행이 정부기관이라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골드만삭스를 키운 것은 월가의 무한경쟁이다. 정부라는 보호막이 아니라는 얘기다. 사장은 정부 관료들이 낙하산으로 내려오고, 직원들은 ‘신의 직장’이 주는 풍요로움에 빠져 있는 공기업으로는 결코 세계적 투자은행이 될 수가 없다. 민간은행 입장에서는 공정한 경쟁이 아니다.
수출입은행과 산업은행도 통폐합해야 할 중복된 기능이 많지만, 개편안은 양 기관 간 간담회를 정례화하는 정도로 시늉만 냈다. 증권회사까지 인수하겠다고 나선 기업은행은 장기적 민영화라는 목표만 제시한 채 아무런 시간표도 없다. 나중에 보자는 얘기다. 이런 안을 무슨 거창한 개혁인 양 요란하게 내놓은 몰염치가 어이없다. 진정한 국책은행 개편은 차기정부에서 기대할 수밖에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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