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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zine Free/ 강화도 재야 로커, 첫음반 내고 홍대앞에 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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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zine Free/ 강화도 재야 로커, 첫음반 내고 홍대앞에 떴는데…

입력
2007.07.06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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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을 앞 둔 나이에 데뷔음반을 발표한 특이한 뮤지션이 등장했다. 국내 대중가요 사상 최고령 데뷔음반일지 모르겠다. 나이가 지긋하니 트로트 가수일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심오한 경지의 블루스 기타 연주와 판소리가 연상되는 독특한 목소리를 구사한다. 게다가 이순신 장군의 시조에 곡을 붙인 <한산섬> 을 비롯해 <동네축구시합> , <마음 다스리는 노래> 등 11곡은 대부분 그가 직접 작사 작곡해 노래한 창작곡들이다.

주인공은 무명의 신광조(59)씨. 음반발표 후 그가 서울 홍대와 인천의 라이브클럽에서 미니 콘서트를 열며 세상을 향해 오랫동안 잠가둔 빗장을 살짝 열었다.

신씨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작곡가 김정욱은 “탁성이지만 인간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따뜻함이 느껴지는 매력적인 음악”이라고 호평한다. 한 재야 기타리스트는 “신중현과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이중산에 필적할만한 기타의 달인이지만 평생 주류에 들어오지 못한 야인”라고 귀띔했다.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손꼽히는 김광석은 “테크닉만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진정한 소리의 세계를 보여주는 기타리스트”로 상찬했다.

그러나 홍대권의 클럽 밴드멤버들은 “스타일이 역겨워 같은 무대에서 공연을 할 수 없다”는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무림 강호에 숨은 고수가 무수히 등장하는 무협지 속의 인물도 아닌데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혼란스럽다. 사실 신씨는 내세울만한 변변한 음악 활동기록도 없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록 기타리스트 사이에서는 아주 유명한 신비로운 인물이다.

신씨는 놀랍게도 강화도 혈구산 자락 자그마한 컨테이너에서 자연과 기타를 벗하며 살아가고 있다. 사연이 많을 것 같아 그가 살고 있는 산자락으로 찾아갔다.

강화도에선 마니산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혈구산 초입에 그의 자그마한 컨테이너가 자리 잡고 있다. 내부를 슬쩍 들여다보니 신씨가 웃통을 벗고 기타와 노느라 삼매경에 빠져있다. 그와 마주앉아 취조(?)에 들어갔다. 그는 “7년 전부터 이 컨테이너에서 살고 있다”며 “음악은 초등학교 6학년 때 기타 치는 동네 형 때문에 시작을 했는데 그룹사운드를 하기위해 17세인 고2 때 가출을 했다”고 자신의 파란만장한 음악인생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그는 1966년 친구들과 4인조 록그룹 ‘몬스터’를 결성해 미8군 용주골 클럽에서 음악을 시작했다. 그 후 69년까지 헬스톤 하우스밴드의 멤버로 전국의 8군 무대를 섭렵한 베테랑 뮤지션이다. 69년 군입대 후 공백기를 가졌다가 72년 5인조 밴드 ‘쟈니5’의 리드기타로 미도파살롱에서 활동을 재개했지만 시작부터 삐그덕거렸다. “그때 클럽 업주가 요구하는 노래를 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지미 헨드릭스 음악만 하려고 드니 아무도 써주질 않았다. 24살에 결혼해 딸 둘을 낳았지만 돈을 못 버니 다 떠나갔다. 난 아주 못된 놈이다.”

투박한 외모처럼 그는 젊은 시절 적수가 없는 무술 6단의 싸움꾼이었다. “평생 사고나 칠 사람인데 몸이 병들어 살기위해 다시 음악을 시작했다.” 80년대에 들어 신중현이 운영했던 이태원의 ‘락 월드’에 섰다. 이 시절 전설적인 재야 기타리스트 이중산과도 세븐클럽에서 음악 인연을 맺었다. 재즈에 국악을 접목한 이판근에게는 화성학을 정식으로 공부했다.

창작을 위해 중대 결심을 했다. 1년간 도보 국토순례 길에 올랐던 것. 1987년의 일이다.

“87년 3.1절 날 강화도 마니산 첨성단에서 단군 할아버지에게 제사를 지내고 길을 나섰다. 다 집어던지고 통기타 한 대를 들고 전국의 산과 들을 다 도는 무전 도보여행이었다.” 태극기가 그려진 머리띠를 동여 맨 그의 이색적인 모습은 당시 일간스포츠에 ‘통일기원 신삿갓 도보국토순례’라는 제하로 대서특필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산속에 가도 저를 알아주는 아이들이 있어 밥도 먹여주고 여비도 주더라. 이번에 발표한 노래들은 다 그때 작곡한 곡들이다.”

인디언을 연상시키는 이국적 외모의 그가 혈구산을 누비며 마음에 드는 바위에 걸터앉아 노래하는 모습은 참 근사하게 보였다. 혈구산은 그의 부모님 묘소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평생 불효를 저질렀으니 이렇게 부모님 묘소를 지키고 살 생각“이라는 신씨. 음반을 발표하니 좋기도 하지만 가치가 있는지 좀 찜찜하다는 그는 “구체적인 활동 계획은 없지만 열심히 음악만 하려고 하겠다. 내가 좋아서 선택한 삶,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후회는 없다”며 씩 웃었다.

글.사진=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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