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7월 29일 새벽 1시 레바논 카나 마을. 주민들은 이스라엘 정찰기를 피해 가장 크고 튼튼한 건물 지하실에서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한여름 열기 속에서 36.5도 체온까지 놓치지 않는 열감지 미사일들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이들을 때렸다. 이 폭격으로 65명의 주민이 죽거나 다쳤고, 그 중 35명이 어린이였다.
정확히 10년 전 110명이 사망한 ‘카나 대학살’ 이후 침묵을 지켰던 언론들도 형제자매의 사진을 든 소년소녀의 눈망울마저 외면할 순 없었다. 학살지였던 카나 마을이 국제적 평화의 상징터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
■ 레바논은 국경 개념이 적고 민족간 갈등이 많은 ‘화약고 중동’의 이미지와는 다른 나라였다. 지중해를 누비며 상거래를 지배했던 페니키아인들이 오래 전부터 자리를 잡아 문자와 화폐, 새로운 상품들을 향유했던 문명과 문화의 전달자였다.
300여년간 오토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 독립, 1926년 의회제도를 갖춘 민주공화국 헌법을 제정했다. 카나 마을은 성경에서 ‘갈릴리 지역의 가나’로 기록된 곳. 이 마을 혼인잔치에 초대된 예수가 포도주가 모자란다는 말을 듣고 항아리에 채운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했다. 최초로 기적을 행한 축복의 장소였다.
■ 1970년대 초 요르단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중립적 개방국가였던 레바논으로 들어가면서 이스라엘과 충돌이 시작됐다. PLO 특공대의 이스라엘 공격, 레바논에 있는 PLO 기지에 대한 이스라엘의 보복이 치열했다.
1978년 3월 이스라엘은 아예 국경을 넘어 침공, 이틀만에 남부지역을 점령했다. 일주일 뒤 유엔은 이스라엘군 철수를 조건으로 유엔잠정군(United Nations Interim Force in Lebanon)을 파견했다. 80년대 이후 이란의 호메이니 추종 세력인 헤즈블라가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면서 UNIFIL은 더욱 분주해 지고 있다.
■ 한국군 동명부대 350명이 UNIFIL에 참여키로 하고 4일 선발대 60여명이 남레바논으로 떠났다. 월남전과 이라크전, 아프간전에 참가한 것과는 달리 유엔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 파견된 것은 소말리아, 서사하라, 앙골라, 동티모르에 이어 다섯 번째다.
동명부대는 헤즈블라 세력의 무기반입과 적대행위 감시가 주된 임무이니 위험이 없을 수 없다. 헤즈블라에 동조하고 있는 현지 주민들이 한국군과는 아무런 원한이 없다며 환영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안심할 수도 없다. 당국의 빈틈없는 준비를 촉구하며, 장병 모두의 안전과 건승을 기원한다.
정병진 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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