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내기가 된 논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 '저 어린 것들은 이제 계절의 시련과 온갖 수난을 이겨내야 한다. 풍성하게 벼로 익어 들녘을 물들일 때까지 저렇게 줄 맞춰 선 채로 한뎃잠을 자면서 가뭄과 비, 바람에 시달려야 한다.'
#김광규 시인이 <시간의 부드러운 손> 이라는 아홉번째 시집을 냈다. 맨 앞에 실린 <춘추> 라는 시-. '창 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한 줄 쓴 다음/들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이며/병술년 봄을 보냈다(중략) 여름 보내고 어느새/가을이 깊어갈 무렵/겨우 한 줄 보탰다//뒤뜰에서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 한 줄의 대구(對句) 또는 결구(結句)를 얻기 위해 제목 그대로 봄부터 가을까지 쓴 시다. 춘추> 시간의>
#내년은 <승무> 의 시인 조지훈 40주기가 되는 해다. 아들 조광렬씨가 최근 <승무의 긴 여운 지조의 큰 울림> 이라는 책을 냈다. 부자 간의 추억과 감상, 지훈 후학들의 회고가 담겨 있다. 같은 고려대 교수였던 김종길 시인이 지훈의 장례를 준비하면서 "그에게 나라를 맡겨도 안심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슬퍼했다는 대목이 책에 나온다. 승무의> 승무>
● 인내와 도야ㆍ신뢰도 못 갖춘채
벼든 시든 사람이든 제대로 되려면 오랜 기다림과 인내, 도야와 연마가 필요하며 사람들의 신뢰가 있어야 한다. 그 과정이 곧 자연과 사람의 시험이면서 검증이라고 할 수 있다. 벼가 익고 시가 빚어지고 믿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무렇게나 거저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저마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이런 자연의 이치와 세상의 진실에 어두운 것처럼 보인다. 대통령이라는 자리의 막중함과 엄중함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출마를 선언한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한나라당 경선후보 토론회를 본 어떤 사람이 "그런 분들이 출마한다는 건 국민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남의 입을 빌려 자기 말을 한 셈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대선판에 나서는 것이야말로 국민을 무시하는 일이 아닌가.
출마 여부가 주목되는 유시민 의원은 계속 재미있는 말을 하고 있다. 그는 한 달도 더 전에 "볍씨를 뿌리지 않고 추수하는 격"이라고 출마설을 일단 부인했다. 최근에는 출마 가능성을 시사하면서도 "너도 나도 하니까 덩달아 나서서 팔 물건도 없으면서 거름 지고 장에 갈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 말을 빌리면 볍씨도 뿌린 적이 없고 팔 물건도 없는 사람들이 대선이라는 장바닥에 거름 지고 나서고 있는 셈이다. 악취나 풍기고, 자칫하면 남들과 제 옷을 버리기 십상이다.
이런 말까지 한 그가 막상 출마를 선언하면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최근 어떤 칼럼니스트가 우리 선거판을 가리켜 <1만 명의 대통령후보>라는 글을 썼지만, 앞으로도 출마선언을 할 사람은 더 있다.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권리를 지닌 선량한 대한민국 국민이 왜 못 나서느냐고 생각하는 것은 자유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중에서 진실로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선이 문제가 아니라 내년 총선이 더 중요하거나 대선 출마를 통해 이름을 알리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 저마다 대선판에서 '함께 놀기'
미국에서도 대선 경선에 나서는 사람들 때문에 고민이 많았나 보다. 1992년 대선 당시 공화당 경선에 등록한 후보가 22명이나 되자 당 지도부가 군소주자들의 중도 포기를 공개적으로 요구해 관철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반대로 서로 출마를 권하며 대선판에서 함께 놀자고 부추기는 형국이다.
그 역시 출마를 선언한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범여권의 후보 난립에 대해 "국민들이 정리해 줄 것"이라고 말했는데, 국민들에 의한 정리까지는 대선판이 너무도 길고 지리하다.
어제는 드디어 이인제씨도 나섰다. 세 번째 대선 도전이다. 그가 뿌린 볍씨는 이미 썩어서 죽은 것으로 보이는데도 본인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안 나서면 영영 죽는다고 판단했나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안 나서면 죽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임철순 주필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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