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창 전집’은 인문주의가 현실을 끌어 안을 때, 귀납돼 나오는 사유의 풍경이 얼마나 풍요로운지 증명하는 전거다. 김우창(71) 고려대 명예 교수는 밝혔다. “(내 글쓰기의)지향점은 내가 만드는 게 아니고 주어진다. 시대에 대해 촉발된 느낌이 (글을) 쓰게 한다.” 글쓰기와 사유의 지향점에 대한 질문에 들려 준 답변은 다섯 권의 책에 모범적으로 적용된다.
평소 이런 저런 지면을 통해 실어 오던 그의 평론을 주목해 오던 박맹호 당시 민음사 사장이 “책으로 만들자”며 강권하다시피 했고, 어느새 진짜 책이 돼 있었다. 1977년 첫 권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 빛을 보고 2권 <지상의 척도> , 3권 <시인의 보석> , 4권 <법 없는 길> 을 거쳐 1993년 마지막 권 <이성적 사회를 향하여> 가 나오기까지, 자칫 비연속적 사유의 기록으로 치부되고 말았을 일련의 글은 출판인의 안목 덕에 전집으로 묶였다. 이성적> 법> 시인의> 지상의> 궁핍한>
그러나 저자 자신으로서는 아직도 결벽증을 떨쳐 내지 못하고 있다. “문학사상, 창작과비평 등 잡지에 수록된 글이라 체계가 없어 유감이에요. 그러나 당시 현안에 민감히 반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저널적이라는 자평이다. “박 사장이 출판을 제의했을 때 체계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나는 거부했으나, 강권에 못 이긴 거죠.” 결과적으로 일련의 책은 한없이 높은 문화의 힘을 갈망하는 한 인문주의자의 내면을 절절하게 증거하고 있다.
생활 주변의 모든 것이 인문학적 텍스트였다. 예를 들어 1972년 12월 9일자 한국일보의 칼럼 ‘천자춘추’(유치진 씀)는 당시 미국 사회가 직면한 변화를 주제로 한 ‘자유의 논리’에서 도입부로 쓰였다(2권 <지상의 척도> ). 첨단의 편의와 번다함이 공존하는 국제 공항은 포스트모더니즘적 상황에 대한 명상의 계기로 전용된다(4권 <법 없는 길> ). 법> 지상의>
책은 우리 문화의 정통을 이야기한다. “조선 자기, 수묵의 산수화, 조촐한 전원 생활의 낙을 이야기하는 시조, 일상적 사건들에 대한 담담한 관찰을 기록한 시화, 수필, 잡기 등은 자연과 인간의 절제된 균형을 목표로 하는 조화의 이상”과 닿아 있다는 것.(3권 <시인의 보석> ) 북한의 예술 또는 예술적 현상에 대해서는 같은 책 중 ‘이념과 표현’이란 제하로 사유를 전개한다. 북한에서 서사시적 충동이 강한 이유, 개인과 사회의 충돌이 혁명적 낭만주의라는 대전제 속으로 복속돼 가는 기제 등이 북한 예술가들의 작품에 근거해 언급된다. 그 모든 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예술 혹은 문화관에 대한 갖가지 현상을 전제한 후에 나온다. 하나의 체계 아래 유기체적으로 꽉 짜인 글이다. 시인의>
예술과 세계, 실존과 현상에 대해 그는 포괄적 입장을 취한다. 글의 설득력은 그 같은 배려의 결과다. 그는 문학은 결국 제도 안에 있으며, 있어야 할 것은 현존하는 것의 잠재적 부분으로부터 나온다고 본다. 관념적 당위가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영역에서 비롯돼야 한다는 믿음이다.
그 인문학적 지평의 방대함은 특유의 유연성과 공존한다. 문학이란, 제도 안에 있으며 있어야 할 것은 있는 것의 잠재적 부분으로부터 나온다는 입장이다. 그의 글은 그래서 지상에 발 디디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설득력을 갖고 접근한다.
이 시대의 화두라 할 페미니즘 역시 사유의 그물에 이미 포착됐다. 여성 문제의 의식과 그 현실적 표현을 반성하고 그 성쇠의 요인을 검토하면서,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의 상황을 점검하는 대목이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격세지감까지 든다. 책은 “오늘날의 여성이 매우 불행한 상황에 있는 것은 사실”이라 전제, 여성 운동의 성패는 다른 사회적 투쟁과 연결돼 있다는 시각을 제시한다. 근대화, 경제 성장, 대중 문화 시대, 민족 분단의 시대, 민족주의 시대, 민족 중흥기, 민중 시대 등을 포괄하는 당시의 핵심적 개념은 ‘산업화’였다.
문화에 대한 통찰은 시대를 초월한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특히 언어의 타락에 크게 기여하는 것은 정치적 또는 상업적 선전을 위한 언어의 사용”이라는 지적은 날로 정치적 대립이 격화돼 가는 지금 한국이 더욱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책은 곳곳에 인문주의에 대한 신뢰의 보루를 쌓아 두고 있다. “적어도 고급 문화의 표현으로는”이라는 유보 조항을 달긴 했으나, 문화는 “한 사회의 인문적 전통의 전부 이외의 다른 것은 아니다”라고 책은 단언한다. “인문적 전통을 통한 교양은 지식의 훈련과 함께 지식으로부터 또는 모든 외적인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마음의 해방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3권은 저자의 본령을 확인시켜 준다. 황석영 이문구 등 소설가, 황동규 김광규 등 시인을 중점적으로 논하는 자리다. 그럼에도 책은 자유에 대한 여러 차원의 참고서로 읽힌다. 그에 대한 사유의 흔적은 전집 곳곳에 배어 있다. 저자에 의하면 세 가지 차원의 자유가 필요하다. 동료와 신뢰ㆍ공감할 수 있는 자유, 자연과 조화하며 사는 심미적ㆍ생태학적 자유, 그리고 스스로의 깨우침으로 도달하는 자유. “세 번째가 바로 인문 과학이 필요한 대목이죠.”
4권 <법 없는 길> 에서는 오래 음미하고픈 명구가 눈을 붙든다. 근원을 사유케 하는 글이다. “마음의 실체는 고요함이다. 이것이 우리를 자아로서 지속하게 하며, 또 세계를 있는 대로 드러내주게 된다.”(‘고요함에 대하여’) 책의 초입은 이맘때가 제격이다. “장마가 끝나고 밝은 해가 비치고 태평양으로부터 올라온다는 태풍의 영향인지 맑은 바람이 분다.…(중략)…반드시 실제적이 아니고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닐지라도 순간을 넘어서는 영원 아니면 지속에 대한 우리의 갈구는 삶의 근원적인 지향인지 모른다.” 법>
자유는 이 전집의 모태이기도 하다. 저자는 “학문적 계보란 내게 없는 것 같다”며 “바로 계보가 없었던 덕에, 즉 요구하는 바가 없어서, 너무 자유로워서, 쓸 수 있었던 것”이라며 돌이켰다. 저자는 자신의 전집이 ‘좋은 사회’에 대한 인문 과학적 이해와, 그를 위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 내는 데 쓰일 수 있게 되기를 바랬다.
김우창 전집은 인문학에 대한 드높은 애정의 결과다. 어느 한 곳에 편재됨 없이, 그 근원적인 지향점을 찾아가는 구도자의 내면 풍경을 요약한 지도이면서 후세를 위한 솟대이다.
장병욱기자 aje@hk.co.kr
▲김우창,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조직위원장 맡기도“인류 정신세계에 기여할 때 진정한 한류”
"소위 인문학의 위기란 취직 문제에서 비롯된, 매우 한국적인 현상이에요. 아주 못살지도 잘 살지도 않는 한국에서 경제 가치가 너무 우월해졌기 때문이죠. 한국만큼 경영ㆍ법과 등 전공 따져 모집하는 데도 없어요." 1963년 이래 서울대와 고려대에서 영문학을 가르친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의 논지는 선명하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인문학이 필수적이라는 인상도, 전통적 문화 유산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인식도 주지 못 한 탓이라는 지적이다.
그의 언어는 항상 현실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행사 조직위원회 위원장 역시 그의 현실 발언 행위다. "도서전 결과, 독일에서 한국에의 관심이 높아진 듯했으나 사그러들고 있어요. 문화란 남이 봐서 남이 부러워할 만큼의 좋은 사회를 만들었는가 하는 문제지요. 제도에 우선해, 삶에 무엇이 중요한가 하는 인식의 수준이죠."
그로부터 귀한 교훈도 얻었다. "(한류처럼) 너무 큰 성과 기대 말라는 거예요. 한국 문화 전시에 독일인들이 보여준 대호응이 진짜 성과죠." '한국 문화의 우수성, 국가 브랜드 향상, 국위 선양, 한류' 운운하는 팸플릿 문구가 그의 주장으로 상당히 순화되기도 했다. 또 돈을 아끼려 노력한 결과, 정부에 예산을 8억원이나 돌려준 일은 그에 비하면 작게 보일 정도다. "문화란 인류의 정신 세계에 기여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해요. 한류와 명품의 밑바닥에는 필요한 게 그런 생각이죠." 그러나 엊그제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과 대학 총장들 간의 만남은 착잡했다. "학문 존중의 전통을 무시한 채 대통령이 총장들을 불러 훈계하는 식은 곤란한데…."
곧 펴낼 책들은 못다한 언어의 아쉬움을 달래준다. 문예 비평지에 쓴 자유와 가치 체계에 대한 글이 도서출판 생각의나무에서 책으로 나오고, 한 신문에 5년째 쓰고 있는 칼럼과 2년 전 학술협의회에서 가진 강연 '마음의 생태학' 등이 대기중이다. 물론 그 밖의 단문은 숱하다. 경제와 권력에 목매다는 한국인들에게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을 그는 권했다. "특히나 부동산에 목매다는 서울 사람들에게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회가 돼야 함'을 말하고 싶군요. 사람 사는 깊이에 대한 고찰이 너무들 없죠." 나무들>
▲약력
1936년 전남 함평 출생, 1954년 서울대 영문과 입학, 63~73년 미국 코넬대ㆍ하버드 대학에서 수학, 74년 고려대 영문과 교수, 1993년 도쿄대 교환 교수ㆍKBS 비상임이사, 2000년 고려대 대학원 원장, 2003 고려대 명예교수
▲주요 저서
<심미적 이성의 탐구> <정치와 삶의 세계> <풍경과 마음> <시대의 흐름에 서서> 등 시대의> 풍경과> 정치와> 심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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