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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17> 프라하-서쪽의 동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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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17> 프라하-서쪽의 동유럽

입력
2007.07.06 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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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에 가보기 전 내가 이 도시와 맺은 인연은 둘이다. 인연이라기보다 ‘사건’이라 하는 것이 낫겠다. 아, 혹시라도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추체험했다거나 이 도시 출신 문인 학자들의 책에 영혼이 송두리째 빨려 들어갔다거나 하는 고상한 사건을 상상하시면 곤란하다.

내가 꼽을 사건 둘은 밋밋하고 산문적이다. 첫 번째 사건은 루이스 길버트 감독의 영화 <새벽의 7인> (1976, 원제 Operation Daybreak)을 본 것이다. 스크린 속 프라하가 어찌나 미려했던지, 영화의 비극적 결말까지 잊힐 지경이었다. 비록 나치 점령 시절 레지스탕스 얘길 그린 영국 영화이긴 하나, 당시엔 공산주의 국가의 수도였던 프라하를 배경으로 삼은 작품의 개봉을 군사정권이 허락한 것이 신통했다.

두 번째 사건은 어느 프라하 여자의 고국 방문이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이었던 듯한데(아니면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나?), 한국전쟁의 파랑(波浪)에 휩쓸려 체코 남자와 결혼했다는, 그리고 당시엔 프라하에 살고 있다는 한국 출신 화가가 서울을 잠시 방문한 적이 있다.

지금은 그의 이름도 생각나지 않지만, 당시 한국 언론에서 대서특필한 사건이었다. 읽기 거북한 기사도 있었다. 국교가 없는 나라의 시민에게 고국 방문을 허락한 대한민국 정부의 관대함을 찬양하는 따위의 논조. 이름만이 아니라 얼굴도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설핏 영화배우 최은희씨와 닮은 얼굴이 아니었던가 하는 느낌이 남아있다.

프라하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봤다거나 프라하의 화가가 서울에 왔다는 게 도대체 무슨 ‘사건’이냐고 물을 독자가 있을 것이다. 그 독자는 아마 20대, 30대의 젊은 독자일 것이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 국경이라는 것은 별 게 아니다. 북한을 포함한 극소수 나라를 빼놓으면,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가지 못할 나라는 이제 없다. 그러나 1980년대 말까지의 냉전시대엔 사정이 전혀 달랐다.

지구 위의 3분의 1 정도 국가는 사회주의 체제 아래 있었는데, 다녀와서 긴 감옥살이를 하거나 심지어 목숨까지 잃을 각오를 하지 않고선 한국인들은 이 나라들에 갈 수 없었다. 역대 군사정권이 극단적 반공정책을 썼기 때문이다. 그 시절 반공은 ‘국시(國是)’였다. 그 나라들에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책이든 영화든 방송이든 그 나라들과 관련된 모든 것이 금제 대상이었다.

내 말은 그러니까, 스크린 속 프라하를 보면서, 또는 프라하 여자의 사진을 신문에서 보면서, 왠지 ‘국시’를 어기는 불편함과 해방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자그레브나 베오그라드나 부다페스트에 처음 갔을 때도 그랬고, 라이프치히나 드레스덴 거리를 걸을 때도 그랬다.

불과 두세 해 전까지 이 도시들이 공산주의자들의 거처였다는 사실을 곱씹노라면, 반공교육에 찌든 장년 사내에게 감회가 없을 수 없었다. 냉전기 이후의 젊은 한국인은, 세계자본주의에 완전히 포섭된 지금의 부다페스트나 드레스덴에서 그런 감회를 갖기 어려울 것이다.

프라하도 내게 마찬가지였다. 1993년 봄 처음 들렀을 때, 나는 이 도시를 얼마 전까지의 공산주의 체제와 연결시켜 바라봤다. 거리의 시민들을 살피면서도, 이들이 두세 해 전까진 공산주의자였겠군 하는 따위의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95년 여름 두 번째로 갔을 때에야, 내게 프라하는 일천수백년 역사를 지닌 중부유럽의 한 메트로폴리스로 다가왔다.

나는 방금 프라하가 중부유럽 도시라고 말했다. 냉전 시대에 유럽은 동부유럽과 서부유럽으로 깔끔하게 쪼개졌다. 공산권 나라들은 동유럽이었고, 비공산권 나라들은 서유럽이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체코(그 당시엔 체코슬로바키아)는 동유럽 국가였고, 오스트리아는 서방 국가였다.

그러니, 프라하는 동방이었고 빈은 서방이었다. 그런데 유럽 지도를 한 번 보라. 프라하가 빈보다 한참 서쪽이다. 체코 출신 작가 밀란 쿤데라도 이런 어법을 두고 투덜거린 적이 있다. 전통적으로 헝가리나 체코는, 오스트리아와 묶여, 동유럽이 아니라 중부유럽으로 분류되는 게 상례였다.

기실 이 나라들과 그 동쪽의 상당 지역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강역이었다. 우랄산맥을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로 삼는 지리학의 상식을 따른다면, 옛 소련의 서쪽부터 오스트리아까지가 죄다 중부유럽이랄 수도 있다.

프라하가 처음이 아니라는 이유를 내세워 내가 사양했음에도, 미라는 하루를 통째로 비워 내 가이드로 나섰다. 미라와 나는 프라하 중앙역과 마사리코보 역 사이의 내 숙소에서 함께 출발해 신구 시가를 두루 둘러보았고, 오후엔 카를교를 건너 말라스트나라 구역과 프라하성(城)을 살폈다.

두 해 전엔 어디가 어딘지 감을 잡을 수 없었으나, 미라와 함께 프라하를 동서로 가로지르며 이런저런 설명을 듣다 보니 도시의 윤곽이 잡혔다. 점심은 바츨라프 광장의 한 카페에서 샌드위치로 때웠고, 저녁은 프라하성 앞 네루도바 거리의 그럴싸한 레스토랑에서 체코 맥주를 곁들여 꽤 호사스럽게 먹었다.

바츨라프 광장을 지나며(말이 광장이지 널따란 길이다) 나는 미라에게 68년 시위에 대해, ‘프라하의 봄’에 대해 물었다. 그 곳은 한국으로 치자면 광주 금남로나 서울 광화문 거리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세 살 때여서 아무 기억이 없어요. 그런데 삼촌 하나가 시위에 앞장서다가 소련군이 들어온 뒤 오스트리아로 탈출했어요. 그 뒤 우리 식구도 당국으로부터 좀 닦달을 당했다고 합니다. 삼촌은 빈에 눌러앉았어요.” 미라가 빈에서 공부하게 된 것도 그 삼촌에게 이끌려서라고 한다.

문득, 역사의 맨 얼굴을 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나저나, 쉽진 않았겠지만 체코에서 오스트리아로 달아날 순 있었군. 오스트리아에서 체코로 달아나는 건 그보다 훨씬 쉬웠을 거고. 냉전 시대에도 진짜배기 냉전을 겪고 있었던 건 남북의 한국인들뿐이었던 모양이다. 남북의 그 냉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블타바강의 카를교 위에 서서 북서쪽의 프라하성이나 남쪽의 하중도(河中島)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은 프라하에서 일상을 영위하는 시민들 몫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관광객이었으므로, 프라하에 머무는 동안 카를교에 멍하니 서 있곤 했다. 어떨 땐 맨 정신으로, 어떨 땐 약간 취한 상태로. 그러다 보면, 한 때 그 다리를 오갔을 저명한 프라하 사람들이 떠올랐다.

‘마지막 점성술사’ 티코 브라헤와 그의 제자인 ‘최초의 근대적 천문학자’ 케플러가, 가톨릭교회의 타락에 제동을 걸려다 장작불 위에서 목숨을 잃은 얀 후스가, 작곡가 스메타나와 드보르자크가, 카렐 차페크나 카프카나 릴케나 베르펠이나 쿤데라나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 같은 글쟁이들이. 미라와 함께 그 다리 위에 서있을 때도 그랬다.

그러고 보면, 이 카를교를 건넜을 프라하 출신 명사(名士)들 가운덴 보헤미아인들 못지않게 유대인들과 독일인들이 많다. 실상 프라하는 역사의 긴 기간 체코인과 독일인과 유대인이 어울려 사는 잡거의 도시였다. 흔히 세계혁명의 해로 알려진(사실은 유럽 혁명이겠지만) 1848년 앞뒤론 프라하에 체코어 사용자보다 독일어 사용자(유대계까지 포함해)가 더 많았다 한다.

중세와 근세에, 보헤미아가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그늘에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19세기 후반 이래 독일어는 프라하에서 세력을 점차 잃었다. 보헤미아의 다른 지역과 모라비아에서 체코어 사용자들이 프라하로 밀려든 데다, 독일어 사용자들 일부가 체코인에게 동화됐기 때문이다.

프라하의 역사를 만들어나간 독일어 사용자 가운데 상당수는 유대인이었다. 17세기에 프라하 인구의 30%는 유대인이었다 한다. 당시 프라하의 유대인 공동체는 아슈케나지(독일과 그 동쪽에 터를 잡은 주류 유대인. 이베리아 반도에 터전을 마련한 유대인들은 ‘세파르디’라 부른다) 공동체로서는 세계 최대였다.

지금도 카를교 북쪽 블타바강변엔 시나고그가 여럿 남아있다. 이 공동체가 시들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중엽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때다. 여제는 프라하 유대인들이 프로이센과 은밀히 내통하고 있다고 여기고 이들을 도시 바깥으로 내쫓았다.

세 해 뒤 추방령이 취소돼 유대인들은 프라하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됐지만, 그 뒤로 유대인공동체의 활기는 점차 줄어들었다.

그래도 19세기 후반 프라하의 독일어 공동체는 게르만인과 유대인을 합쳐서 시민의 20% 안팎을 이뤘다. 카프카나 릴케 같은 이들이 그 20%에 속했다. 이 독일어 공동체가 프라하에서 거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다. 그 언어공동체의 한 축이었던 게르만인들은 전쟁의 가해자로서 쫓겨났고, 다른 축이었던 유대인들은 전쟁의 피해자로서 고향을 등졌다. 프라하의 유대인들은 나치 점령 직후 도시 바깥으로 달아나거나 점령 중에 홀로코스트에 휘말려 살해됐다.

살아남은 유대인들도 종전 뒤 공산혁명을 피해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지금은 유대인이 아마 천 명도 안 될 거예요.” 카를교 위에서 미라가 내게 얘기해 주었다. 그게 95년 여름이었다. 지금은 더 늘었는지 줄었는지 모르겠다. 미라는 외할머니가 독일계였다. 프라하의 독일인들은 이 도시가 나치 점령에서 해방된 뒤 대부분 독일로 쫓겨났다. 그 뒤 프라하는 온전히 체코인들의 수도가 되었다.

프라하의 외국인들로서 이들 독일어 사용자보다 내게 먼저 떠오르는 이들은 러시아인들이다. 1945년(해방군으로서)과 1968년(진압군으로서) 탱크를 타고 이 도시에 들어온 소련군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 언어학과 시학의 구조주의 혁명을 이룩한 프라하학파의 러시아인들을 말하는 거다.

프라하학파의 다수는 체코인들이었고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학맥을 이어나갔지만, 그 학파의 가장 뛰어난 이론가 둘은 양차 세계대전 사이 이 도첼?머문 러시아인이다. 니콜라이 트루베츠코이와 로만 야콥슨이 그들이다. 향년 50을 채우지 못한 트루베츠코이가 음운론 한 우물만 팠던 데 비해, 84년을 산 야콥슨은 미국으로 귀화해 하버드와 MIT에서 가르치며 일반언어학에서 시학을 거쳐 커뮤니케이션학에 걸치는 방대한 언어이론 체계를 구축했다.

블타바강을 되건너 구시가 광장의 성(聖) 미쿨라슈 성당 앞에서 미라는 나를 얀에게 인계했다. 둘이 함께 프라하의 밤에 몸을 맡기며 체력의 한계를 시험해볼 작정이었다. 코앞에 얀 후스 동상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불행하게 삶을 마친 이 위대한 종교개혁가는 내 친구와 이름이 같았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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