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8일 중국 베이징의 국빈관 댜오위타이(釣魚臺) 14루 앞에 15년 만에 다시 섰다. 1992년 5월13일 한중수교 비밀회담이 시작된 현장이다. 15년 전 그 날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 첫 발을 내딛는 복잡 미묘한 심정이었었다.
그러나 이 날은 달랐다. 수교회담의 세 주역으로 중국측 교섭을 총지휘했던 쉬둔신(徐敦信) 외교부 부부장(차관), 예비회담의 수석대표로 나의 카운터 파트였던 장루이지에(張瑞杰) 본부대사, 막후에서 실무를 책임지고 있던 아주사 부사장(아주국 부국장)으로 수교 후 초대 한국주재대사를 역임한 장팅옌(張庭延) 대사 부부가 나의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팅옌 대사의 부인 단징(潭靜) 여사는 아주사 1등 서기관으로 수교회담에 참여했었다. 물론 세 주역 모두 나처럼 현역에서 물러난 지 오래다.
그동안 중국을 수도 없이 왕래했지만 지난달 출장 길은 이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특별하고도 뜻 깊은 여정이 됐다. 베이징에 도착한 6월 14일 두 장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댜오위타이 14루를 방문해서 기념촬영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외교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실현 여부는 미지수였지만 언젠가는 꼭 다시 가보고 싶다고 마음속에 묻어두고 있던 터에 한국일보에 ‘한중수교비망록’을 연재하면서 실천에 옮기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중국 외교부가 뜻하지 않은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 나와 내 가족을 만찬에 초대한 것이다. 게다가 외교부 직원 한 명을 통역으로 파견하는 배려까지 했다. 14루의 외장은 흰색 타일로 변함이 없다. 오른쪽 넓은 접견실로 들어가니 기억이 새로워진다.
“여기가 한중수교 비밀교섭이 시작된 역사적 장소입니다. 권 대사와 장루이지에 대사가 교섭의 전면에 있었고 우리는 중국측 대표단의 막후에 있었지요.”
장팅옌 대사가 먼저 기억을 살렸다.
“이 방을 기억합니까?” 장루이지에 대사가 14루 오른쪽 첫 번째 방, 바로 회담장소였던 곳으로 안내하면서 운을 뗐다.
옛 회담장의 테이블을 마주하고 않은 장루이지에 대사는 당시를 회상하며 아무리 빨리 서둘러도 반년 이상은 걸릴 것으로 중국측은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즉 한국이 대만과의 특수한 관계를 정리하는 문제와 중국이 북한에게 수교를 통고하는 문제는 서로 시간이 걸리는 최대 난제라고 여긴 것이다.
“왜 조어대로 정했습니까?”
나는 세 주역을 상대로 궁금했던 점들을 묻기 시작했다.
“비밀유지가 완벽한 외교부 국빈관이지요.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와 키신저 국무장관 간 중미 비밀수교와 중일 수교 등 비밀회담은 모두 여기서 했습니다.”
“그럼, 왜 14루였나요?”
“댜오위타이에서도 아주 구석진 곳이라 가장 눈에 덜 띄는 곳입니다.”
“그때 북한 대표단도 여기에 와 있다고 하면서 우리 대표단을 밖으로 멀리 못 나가게 겁을 주었지요?”
“기억납니다. 북한대표단이 14루 반대쪽 어느 곳에 머물고 있었을 겁니다.”
쉬둔신 부부장은 이 자리를 빌려 “덩샤오핑(鄧小平) 지도자가 역사적 선견을 갖고 한중수교의 결단을 내린 것이며 그 결단은 옳았고 지난 15년간 천지개벽(天地開闢)이 일어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의 평가처럼 덩 옹은 실제로 80년대 중반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에 관심을 표명했다고 한다. 첸치천(錢其琛) 전 외교부장의 회고록에는 그러한 내용이 잘 기록돼 있다.
덩 옹은 1985년 4월 “중한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은 중국 입장에선 필요한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 이유로 “첫째, 장사를 할 수 있다. 이는 경제에 좋은 것이다. 둘째는 한국과 대만의 관계를 단절시킬 수 있다”고 두 가지를 들었다.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88년 5월부터 9월 사이 덩 옹은 외빈을 만나는 자리에서 여러 차례 중한 관계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중국으로선 한국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게 유익무해(有益無害)하다고 말했다.
경제적으론 쌍방 발전에 모두 유리하고 정치적으론 중국의 통일에 유리하다는 것이었다(한국과 대만의 관계를 단절시킴으로써 도움이 된다).
덩 옹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시기가 성숙되면 한국과의 경제 문화 교류를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빠르고 더 넓게 발전시킬 수 있다고 전망했다. 중국과 한국의 민간교류를 발전시키는 것은 중요한 전략적 포석으로 대만과 일본, 미국, 한반도는 물론 동남아의 평화와 안정 모두에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밝혔다.
한국에 대한 덩 옹의 발언 의미가 이처럼 갈수록 중요성을 더해 가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수교협상 무렵의 중국측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우리측 예상대로 덩샤오핑 옹이 아니면 책임지고 한중수교를 밀어붙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이 중국측 仄?핵심 주역들에 의해 확인된 셈이다.
쉬둔신 부부장은 “권 대사는 잊지 못할 중국의 오랜 친구이며 그래서 오늘 권 대사 가족을 모두 이 역사적 자리에 초대해서 감사를 표하는 것”이라고 이날 만찬의 의미를 부여했다.
나는 6월13일자부터 연재를 시작한 ‘한중수교 비망록’이 실린 한국일보 한 부 씩과 인삼차에 우리 가족의 정성을 담아 세 주역에게 각기 선물로 전하고 조어대 14루를 나섰다. 3시간에 걸친 댜오위타이의 만남에서 중국측 세 주역은 수교 교섭과정에서 내가 그토록 알고 싶었던 일들을 거리낌 없이 얘기해 주었다.
지난 15년간 한중관계에 천지개벽이 일어나고 이제는 비밀 교섭의 모든 과정까지도 투명하게 국민들에게 가릴 것 없이 알려 줄 때가 당도한 것으로 본 것이 아닐까?
● 국빈관 조어대는 70년대 핑퐁외교 6자회담 장소 등 중국현대사의 산실
한국과 중국이 1992년 비밀리에 수교협상을 가진 베이징의 국빈관 댜오위타이(釣魚臺)는 쉽게 말해 중국 현대사의 산실이나 다름 없다. 외국 정상의 숙소로서 뿐만 아니라 가깝게는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 장소, 멀게는 70년대 키신저 박사와 저우언라이 총리의 핑퐁외교 장소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42만 평방미터의 부지에 약 7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호수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댜오위타이에는 모두 18개의 특급호텔급 건물이 들어서 있다. 댜오위타이는 원래 황제의 낚시터였다. 800여 년 전 금나라 장종(章宗) 황제가 낚시를 했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청나라 때에는 서태후(西太后)가 여기에 행궁을 지어 섭정을 하던 곳이기도 하다. 이제는 일반인에게 개방되었지만 여전히 민간인으로 댜오위타이에 초대받기는 힘들다. 나는 한중 수교회담을 앞두고 키신저 회고록을 숙독했다. 키신저가 어떻게 중국과의 얽힌 매듭을 풀어갔는지 머리에 담아두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키신저와 저우언라이가 댜오위타이에서부터 마오타이를 매개로 신뢰를 쌓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둘이 마지막 담판으로 항저우(杭州) 영빈관에 묶게 됐을 때 마오타이를 무려 50여잔이나 주고 받으며 수교의 토대를 구축했다.
15년 전 한중수교 비밀회담에서도 마오타이는 양국의 서먹서먹하고 딱딱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자연스럽게 한국과 중국대표단은 마오타이를 수교주(修交酒)로 명명하기에 이르렀다.
한중문화청소년협회(미래숲)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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