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욕망의 비밀상자, 요트
평론가가 되기 전 보았던,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물속의 칼> 은 멋진 영화였다. 1시간 30분 내내 드넓은 바다와 요트 안에서 숨막힐 듯한 성적 긴장감과 질투의 삼중주에 휩싸인 한 중년 부부와 떠돌이 청년의 이야기. 제목 <물속의 칼> 의 '칼'이 묘한 성적 메타포로 작용하고, 청년을 죽이고 싶어하는 남자와 청년의 육체를 포획하고 싶어 하는 여자의 욕망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드넓은 바다를 배회하는, 탄복할 만한 영화였었다. 물속의> 물속의>
독일영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여름휴가> 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요트'라는 기호에 대해 명상하게 된다. 인간의 숨겨진 욕망, 삶의 에너지 리비도와 죽음의 에너지 타나토스가 함께 휘감기는 영화들, 그러니까 <물속의 칼> 이나 <미필적 고의에…> 외에도 <태양은 가득히> 같은 영화들은 왜 굳이 요트를 배경으로 하는 것일까? 태양은> 미필적> 물속의> 미필적>
사실 <사랑의 유람선> 이니 <타이타닉> 같은 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은 왠지 시작부터 ‘보트는 사랑을 싣고’ 류의 대책 없는 로맨스가 떠오르게 마련이다. 타이타닉> 사랑의>
그런데 이 보트가 요트로 살짝 바뀌기만 해도, 로맨스는 증발하고 끈적끈적한 붉은 욕망의 기운이 시원의 대양을 뒤덮는다.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는 폐쇄공포증적 미장센 안에서 부글거리는 이성의 한계가 욕망의 비등점을 타고 죄다 휘발해 버리는 것이다.
정치학연구소에서 일하는 미리암과 앙드레는 겉보기에는 지극히 지적이고 합리적인 부르조와 지식인이지만, 아들의 여자친구 리비아와 떠돌이 기질이 있는 미국인 남자 빌을 만나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빌은 왠지 10대 소녀인 리비아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고, 그런 빌을 바라보는 미리암의 시선이 심상치가 않다.
재미있는 것은 요트 안에서만큼은 늘 주인공들의 가면은 계급적 치장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태양은 가득히> 에서 궁극적으로 부잣집 아들이 살해되고, 그 자리를 가난한 하인 노릇을 하던 알랭 드롱이 탈환해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요트 안에서만큼은 늘 뭔가가 역전이 되는 것을 기대해도 좋다. <미필적 고의에…> 에서도 마찬가지다. 미필적> 태양은>
세련되고 균형감각이 있어 보이던 주인공 미리엄은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던 빌이 리비아를 사랑한다는 말을 듣자, 점점 잠재되어 있는 마성을 드러낸다. 함께 세일링을 하면서 리비아는 미리암에게 ‘자리를 바꾸어 달라’고 요청하지만, 미리암은 그 청을 단번에 거절해 결과적으로 리비아가 돛대에 머리를 맞아 치명적인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왜 미리암은 자리를 바꾸어 주지 않은 것일까? 치정극과 스릴러와 드라마의 외양을 두루 갖춘 영화에서, 미리암과 리비아의 ‘자리바꿈’은 단지 물리적인 좌석의 뒤바뀜이 아니라, 계급적 심리적 뒤바뀜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요트 영화는 욕망을 다루면서도 계급의 사회학을 포기하지 않는다. 요트의 은밀함, 폐쇄성, 저돌성. 그래서 개인적으로 영화 속의 요트만 떠 올리면, 뭔가 치명적인 심리게임에 대한 기대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그러니 물리지 않는 스펙터클에 관심이 있는 상업영화 감독들이 <타이타닉> 이니 <포세이돈> 을 쏟아낼 때, 인간심리의 탐구자들이며 장차의 예술감독의 월계관을 쓰고 싶어하는 감독들이여 은밀히 요트를 타라. ‘영화 속 요트는 숨겨진 욕망의 비밀상자. 그 뚜껑을 열어 보면 깜짝 놀랄만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고, 스테판 크로머 감독의 <미필적 고의에…> 역시 솔깃하게 당신을 유혹하고 있다. 미필적> 포세이돈> 타이타닉>
영화평론가ㆍ대구사이버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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