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서울역사. 우리나라 첫 철도인 경인선의 시발지이자 일제의 대륙진출 야욕을 구현한 거점지. 근대화 과정에서 가난을 떨치기 위해 수많은 농어촌 상경자들이 보퉁이 하나에 의지한 채 새 인생을 출발했던 곳.
남대문정거장(1900년)에서 경성역(1925년)으로, 미군정에 의해 다시 서울역(1945년)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한 세기 민족의 영욕과 삶의 애환을 담았던 구 서울역사가 한 패션디자이너에 의해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다.
클래식한 감성과 복고적 무드로 유명한 홍승완씨가 주인공이다. ‘서울역 리뉴얼 프로젝트’라는 명칭아래 내달 6일 오후 7시 구 서울역사에서 사상 첫 패션쇼를 여는 홍씨를 만났다.
▲ 구 서울역사에서 패션쇼를 한다는 발상 자체가 놀랍다
“늘 역사와 문화를 아우르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최첨단 고층빌딩들이 쑥쑥 들어서는 시대, 몇 안 남아있는 근대 건축물에 새로운 관심과 역할을 부여하는데 패션쇼 만한 퍼포먼스가 또 있겠나 싶고.”
▲ 구 서울역사에 가본 소감은
“전율을 느꼈다. 언뜻 그래도 뭔가 행정적 기능을 하겠지 싶었지만, 지금 구 서울역사는 폐허다. 서울역은 1925년 일제가 준공했을 때 만해도 일본의 동경역에 이어 아시아 2위 규모를 자랑하는 아름다운 르네상스양식 건물이었다. 지금은? 완전히 단전 단수된 채 텅 비어있는 폐허. 그러나 장엄하더라. 처음 역사안으로 들어갔을 때 머리카락이 삐쭉 서는 느낌이었다. 높고 굵은 기둥들이 열을 지어 서있고 아치형 돔은 아득했다. 서울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상징이자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패션쇼 일정이 다소 촉박하게 결정된 것 같다
“서울역을 염두에 두고 2달 전부터 작업에 들어갔는데 역사 관리를 둘러싸고 철도공사와 문광부 양쪽의 협의를 끌어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구 서울역사는 철도공사 소유이지만 사적 제 284호로 지정돼 문광부의 관리를 받는다)
▲ 패션쇼에는 조명과 무대 등 설치가 많이 든다.
“‘하드리벤지’의 07/08 추동복과 ‘스위트리벤지’의 08 춘하복을 아우르는 컬렉션이지만 건물이 갖고 있는 역사성을 살리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홍승완의 작업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관객에게 우리의 근대와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을 환기 시키는 것도 목표다. 조명과 설비는 최소화하면서 공간 자체와 패션의 어우러짐을 살리고 싶다.”
▲ 일제시대 명동을 배경으로 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하류인생> 의상디자인도 했었다. 그러고 보니 근대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 같다 하류인생>
“딱히 근대라기 보다는 역사와 전통적인 가치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한다. 내 브랜드 ‘스위트리벤지’가 추구하는 것도 복고의 스펙트럼 속에 옷의 전통적 가치를 담는 것이다.”
▲ 모두 몇 벌의 옷을 선보이나
“1,2부로 나뉘어 60벌쯤 될 것 같다. 쇼 뒤에는 자연스럽게 이브닝 파티가 이어질 것이다. 행사가 문화와 전통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 지난 봄 서울컬렉션에 불참했다. 서울역 프로젝트 때문인가
“서울컬렉션의 의미가 많이 퇴색했다고 생각한다. 실제적인 제품수주 기능 등 비즈니스가 빠진 채 천편일률적인 공간에서 창의성 운운하는 것에 회의를 느꼈다. 오래전부터 나만의 색깔을 내 보일 수 있는 단독컬렉션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번이 그 첫 시도일 뿐이다. 서울컬렉션과 달리 정부지원금을 받을 수는 없지만 ‘굶더라도 해보자’고 욕심을 냈다.”
▲ 오세훈 서울시장이 서울시 중심사업으로 패션분야를 키우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번 서울역컬렉션이 큰 자극이 될 것 같은데 도움을 청하고 싶은 것은 없나
“와서 옷 좀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는데, 일손이 워낙 딸려서… 하하, 농담이고 우리 옷을 많이 입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이성희 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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