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은 온 산과 계곡에 불적(佛蹟)이 있다고 하는 한국 불교의 성지다. 최근 50여년 만에 빗장을 연 내금강에서도 많은 불교 유적이 숨을 이어왔다. 하지만 밭은 숨이다.
한국전쟁 당시 당한 폭격으로 훼손돼 터만 남은 유적은, 세월도 비껴간 듯한 내금강의 절경과 대비돼 안타까움만 더할 뿐이다.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을 비롯해 원로 스님과 불교도 등 160명으로 구성된 순례단이 22일 내금강의 불교 유적지를 둘러 보았다. 4년에 걸친 외금강 신계사 복원 현장을 방문하고 내금강에 산재한 불교 유적을 답사하기 위해 마련한 행사다.
내금강 만폭동 입구에 자리한 표훈사는 비교적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598년 백제 고승 관륵과 융운 스님이 신림사란 이름으로 창건한 이 사찰은 한국전쟁 당시 일부 소실됐으나 북한 측이 반야보전과 영산전을 복원해 비교적 양호한 상태를 보였다. 물론 이들 복원된 건물이, 세월의 흔적을 지닌 채 보존된 능파루와 칠성각 등이 빚어내는 그윽한 아름다움을 따라갈 수는 없다.
표훈사 이외의 불교 유적은 대부분 훼손이 심해 보수가 절실해 보였다. 표훈사와 함께 내금강의 양대 사찰로 불리는 장안사는 551년 고구려의 혜량 스님이 신라에 귀화하면서 창건했다.
해방 이전에는 6전(殿) 7각(閣) 2문(門) 외에10여 채의 부속 건물을 거느린 대찰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찰의 규모를 가늠케 하는 드넓은 들판에 기단과 주춧돌, 부도탑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장안사가 주는 덧없음은 마하연사에서도 느낄 수 있다. 마하연사는 661년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고 한국 근현대 선(禪) 지식인의 참선 도량으로 유명하다. 경허 선사를 비롯해 효봉, 성철, 탄허 스님 등이 이곳에서 수행 정진했다.
그러나 53간 규모의 조선 제일 선원이었다던 옛 모습은 일제시대에 찍은 사진으로나 전해질 뿐 지금은 풀 숲 사이로 기단, 계단만 남은 옹색한 공터에 불과하다. 대신 본채 뒤편의 칠성각이 홀로 마하연사 터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마하연사 터는 그 역사적 의미를 알리는 안내판 조차 없이 방문객을 맞고 있었다.
만폭동 계곡을 오르다 보면 보덕암을 만나게 된다. 고구려 보덕 화상이 창건한 이 관음도량은 1675년 중건된 것으로 지금은 동굴을 막아 절벽에 지은 본전만 남아 있다.
계곡 아래에서 바라본 보덕암은 20m 높이의 절벽에 매달린 듯한 기묘한 모습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굵은 쇠사슬로 휘감아 놓았다. 기와 지붕에는 군데군데 대충 시멘트로 마감한 흔적이 역력하다.
3개의 비석과 7개의 부도탑이 있는 백화암 터에는 1632년 세워진 서산대사비가 우뚝 서 있지만 비석의 옥개석은 금이 가 있고 귀부의 오른쪽 일부는 떨어져 나간 상태다.
지관 스님은 “6ㆍ15 선언을 계기로 남북 불교계가 힘을 모아 신계사를 복원했다”며 “내금강 유적 복원도 10월 13일 신계사 낙성식 이후 북측과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순례에 동행한 조계종 한국불교문화사업단장 종훈 스님도 “내금강 불교 유적이 깊은 산 중에 있어 복원 작업이 쉬워 보이지 않는다”면서 “장안사 터와 마하연사 터의 기단과 주춧돌을 제자리에 놓고 서산대사비 등 훼손된 유물의 보수를 우선 추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금강산=글ㆍ사진 김회경기자 herm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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