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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16> 빈 -제국의 심장, 두 유럽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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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16> 빈 -제국의 심장, 두 유럽의 경계

입력
2007.06.27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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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커피’라는 말의 내력은 모르겠으나, 내 젊은 시절 한 때 서울의 찻집에서는 크림 거품으로 ‘토핑’을 한 커피를 이 이름으로 내놓곤 했다. 요즘의 ‘카푸치노’ 비슷했던 듯한데, 그 둘이 똑같은 건지는 모르겠다. 유래가 수상쩍은 말들이 흔히 그렇듯, ‘비엔나커피’라는 말도 일본사람들한테서 빌려온 것일까? 아무튼 이 말은 이제 거의 쓰지 않는 듯하다. ‘비엔나커피’라고 불렀던 대상이 가뭇없이 사라지지는 않았을 테니, 그것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 있기는 할 게다. 그 말이 무언지는 모르겠으나.

돌이켜보니 그 시절엔 찻집도 대개 ‘다방(茶房)’이라 불렀다. 이 말도 이제, 적어도 대도시에선, 사어(死語)가 돼가고 있는 것 같다. 그 뒤 ‘티룸’이라는 말도 반짝 유행을 탔지만, 대세는 ‘커피숍’인 듯하다. ‘카페’나 ‘커피전문점’이라는 말도 있지만, 카페에선 차만 파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그리고 커피전문점은 흔히 프랜차이즈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보통 찻집과 다르다. 하기야 예전의 ‘다방’에서도 위스키를 팔았고, 요즘의 ‘찻집’에서도 흔히 알코올음료를 판다. 차만 파는 찻집은, ‘전통 찻집’말고는 찾기 어렵다.

사실 ‘찻집’의 주메뉴가 커피인 것도 묘하다면 묘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커피는 커피일 뿐 (녹차나 홍차 같은) 차(茶)가 아니니 말이다. 비록 ‘차’라는 말이 차나무 이파리와의 필연적 관련을 끊어내고 인삼차, 대추차, 생강차, 보리차, 옥수수차 따위를 두루 가리키게 되긴 했지만. (같은 한자를 ‘다’로 읽으면 숭늉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이라 한다.) 말들 사이의 관련을 생각하면, 유럽에서 흔히 그러듯 커피 파는 곳을 ‘카페’라 부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 쪽 카페에서도 커피만 파는 것은 아니지만.

각설하고, 비엔나(현지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으로는 ‘빈’) 케른트너 거리의 카페 게르스트너에는 ‘비엔나커피’가 없었다. 아니 이 거리의 다른 카페 메뉴판에도 ‘비엔나커피’라는 건 적혀있지 않았다.

빈 한복판이었는데도 말이다. 함께 있던 미라 S.와 얀도 그런 이름의 커피는 들어본 적 없다고 단언했다. 미라는, 프라하에서 나고 자라긴 했으나, 빈에서 5년째 살고 있었다. 그녀는 빈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미라와 얀은 오누이다. 얀은 파리에서 프리랜스 기자로 일하며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역시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나와는 강의실에서 알게 된 친구다. 그가, 경제학과는 그리 상관없어 보이는 오스왈드 뒤크로 교수의 논리학 세미나에 나와 함께 참석한 것이 인연이 됐다.

그와 어울리다가 나는 프라하가 그리워졌다. 그래서 여름방학을 맞아 프라하의 부모님 댁을 찾게 된 얀을 따라 그의 누이가 사는 빈으로 왔다. 빈에서 며칠 묵은 뒤 셋이 함께 프라하로 가기로 계획을 짠 것이다. 95년 여름이었다. 빈도 프라하도 내겐 두 번째 발걸음이었다.

유럽 바깥 사람들이 유럽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도시는 파리나 로마나 런던 같은 데다. 그러나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빈을 ‘유럽의 한복판, 그 속살’이라 불렀다.

아닌게아니라 빈은 지리적으로 얼추 유럽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가르시아 로르카가 빈을 유럽의 복판이라 부른 것이 단지 지리적 의미로만은 아니다. 중세 후기 이래 20세기 초까지 빈은 유럽의 정치적 복판이었다. 이 도시는 수세기 동안 신성로마제국(독일제1제국)의 ‘실질적’ 수도였고, 19세기 후반부터 제1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수도였다.

빈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일찌감치 터를 잡은 합스부르크 가문 덕분이다. 유럽 중세사에서 ‘황제’란 곧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일컫는 것이니, 로마가 중세 기독교세계의 정신적 수도였다면 빈은 세속적 수도였다 할 수 있다.

빈이 오래도록 신성로마제국의 ‘실질적’ 수도였다는 것은 이 도시가 독일의 중심도시였다는 뜻이다. 중세 문헌에서 ‘독일인’이라는 말이 나올 때, 그 말은 오늘날 우리가 ‘오스트리아인’이라 부르는 주민집단을 가리키는 일이 적지 않다.

나폴레옹 전쟁이 독일민족주의를 촉발하면서 일기 시작한 통일운동에서 프로이센이 주도권을 잡은 뒤, 빈은 독일 민족의 수도 자리를 베를린에 양보해야 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하기까지 독일 역사가 오스트리아 역사를 한 기둥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엄연하다.

빈이 독일인들만의 수도는 아니었다. 신성로마제국 자체가 그 판도 안에 게르만족만이 아니라 중부 동부 유럽의 수많은 민족을 품고 있었거니와, 프로이센-오스트리아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패한 뒤 빈을 수도로 삼아 수립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도 그 무게중심을 약?동쪽으로 옮기며 수많은 민족을 품에 안고 있었다.

오늘날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만이 아니라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과 폴란드 일부가 죄다 이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강역에 속했다. 그러니 빈은, 비록 유럽 전체의 수도라 할 순 없었을지라도, 중부-동부유럽의 수도라 할 만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시절 한 때, 빈 인구의 1/3은 슬라브인이거나 헝가리인이었다.

이 중동부 유럽의 수도는 정치적 반동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 이미지를 가장 짙게 만든 사람은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 재상으로서 소위 빈 체제를 주도한 메테르니히지만, 그 앞뒤 시대에도 빈은 유럽 정치사에서 주로 보수주의자들 편에 섰다. 그 점에서 빈은 파리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다. 그리고 이 두 도시의 정치적 경쟁관계는 파리가 혁명의 분만실이라는 명성을 얻기 한참 전부터 부르봉왕가와 합스부르크왕가의 대립이라는 형태로 작동하고 있었다.

빈과 파리의 경쟁이 정치 영역에서만 벌어진 것은 아니다. 예술 공간에서도 이 두 도시는 라이벌이었다. 조형예술가들이 주로 파리로 몰렸던 데 비해 빈에는 주로 음악가들이 몰렸으나, 그 갈래를 가로지르며 이 두 도시는 유럽의 가장 뛰어난 창조적 정신들을 유혹했다.

모차르트나 베토벤은 빈 출신이 아니었지만, 빈에 데뷔하고나서야 자존감을 누릴 수 있었다. 빈 근처에서 태어난 슈베르트의 가곡 대부분은 빈에서 만들어졌다. 이탈리아 사람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당대 음악계의 황제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빈의 궁정악장이었기 때문이다.

이자벨 위페르나 브누아 마지멜 같은 프랑스 배우들이 주요 배역을 맡아 프랑스어로 제작된 영화 <피아니스트> 가 빈을 배경으로 삼은 것은 그 원작자 엘프리데 옐리네크와 연출자 미하엘 하네케가 오스트리아 출신인 것과 관련 있겠지만, 빈이라는 배경은 우리의 상투적 상상력과도 우아하게 부합한다. 명망 있는 미술학교가 파리에 있는 게 자연스럽듯, 명망 있는 음악학교는 빈에 있는 게 자연스럽다. 20세기 후반 이후 두 도시 다 그 성가를 뉴욕에 넘겨주기는 했지만.

빈의 역사적 중심부는 이네레슈타트라 불린다. 서울의 사대문 안에 해당한다. 이네레슈타트는 ‘링’이라 부르는 환상도로로 둘러싸여 있다. 본디 외부 침입자를 막기 위해 벽이 둘러쳐져 있던 곳이다. 이 벽이 19세기 중엽 철거되면서 빈의 지리적 확장이 시작돼, 오늘날 빈은 이네레슈타트를 포함한 23개 구로 이뤄져 있다.

‘링’을 따라 이네레슈타트를 1/3 바퀴만 돌아도 중부유럽 정치문화사가 누락시킬 수 없는 건축물들을 숨가쁘게 만날 수 있다. 빈 대학(이 대학이 유럽 정신사에 끼친 영향은 분과학문들의 입문서만 훑어도 또렷이 알 수 있다), 시청사, 궁정극장, 국회의사당, 자연사박물관과 미술사박물관, 오페라하우스 따위가 그것들이다.

오페라하우스에서 이레네슈타트 한 복판 장크트슈테판 성당으로 뻗은 길이 케른트너 거리다. 그러니까 이 거리는 유럽의 복판(빈)의 복판(이레네슈타트)의 복판(장크트슈테판성당)으로 뻗은 길이다. 그 거리의 한 카페에서, ‘비엔나커피’를 팔지 않는 그 카페에서, 나는 미라를 처음 봤다. 초등학생 시절 나는 임창 만화(마흔이 넘은 한국인이라면 만화가 임창 선생을 모를 수 없을 테다)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그이 만화의 주인공 가운데 ‘미라’라는 이름의 여학생 캐릭터가 있었다.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백인 외모를 하고 있었다. 카페 게르스트너에서 미라(‘미로슬라바’라는 이름의 애칭이라 한다)를 처음 본 날, 나는 문득 초등학생 시절의 만화 속 미라를 떠올렸다. 미라는 20수년의 세월과 9,000km의 거리를 건너뛰어 빈의 한 카페에 나와 함께 앉아있었다.

빈의 건축물 사이사이는 정원으로 채워져 있다. 아랑후에스의 정원이 널따란 한 뭉치 정원이라면, 빈의 정원은 여기저기 오밀조밀 산포된 정원들이다. 그 잘게 나뉜 푸르름은, 서쪽 교외의 ‘빈 숲’에 이르러, 드넓은 뭉치로 합쳐진다. ‘푸르름의 미분과 적분’이 빈의 이미지다, 라고 말하고 보니 그것은 파리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파리 역시 시내에 수많은 정원을 품고 있고, 거기 더해 동서 교외에 꽤 널찍한 숲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라이벌 도시는 여러 모로 닮은 도시이기도 하다.

지금은 대통령 집무실이 들어서 있는 ‘링’ 안쪽의 웅장한 왕궁만이 아니라 링 바깥의 쇤브룬궁전이나 벨베데레궁전도 오랜 세월 유럽을 호령했던 합스부르크가의 위세를 증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유럽 안의 위세였다.

오스트리아는 수백 년 동안 영국, 프랑스, 러시아, 스페인에 맞먹는 유럽의 강대국이었으나, 다른 강대국과 달리 유럽 바깥으로 야심을 펼친 적이 없다. (남아메리카에 광대한 식민지를 경영하고 있던 스페인 왕을 왕위계승의 기괴한 방정식에 따라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 황제가 겸한 시절은 逞嗤? 식민지 경영은 스페인의 사업이었지 오스트리아의 사업은 아니었다.) 프랑스나 영국이나 스페인의 어떤 도시들에 있는 비-유럽적 풍경이 빈에서 거의 발견되지 않는 데는 그런 역사적 배경 탓도 있을 게다. 그 점에서도, 빈이야말로 유럽의 속살이라는 가르시아 로르카의 말은 정당하다.

고대 로마인들이 ‘빈도보나’라고 불렀을 때, 빈은 제국의 북단(北端) 요새였다. 그 이후의 긴 역사를 통해 빈은 종종 유럽의 동단(東端) 요새 노릇을 했다.

몽고군도 투르크군도 빈을 포위하거나 잠시 점령했을 뿐, 제 영토로 삼진 못했다. 빈은 그런 맥락에서 유럽 문명의 방파제였다. 그렇다면 빈은 유럽의 역사적 중심이면서 땅끝이었다. 냉전 시대에 유럽과 ‘다른 유럽’(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선 중부-동부유럽)의 경계가 빈이었던 것은 이 도시의 팔자였는지 모른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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