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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현 전 대사의 한중수교 비망록] <3> 외무장관의 밀명을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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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현 전 대사의 한중수교 비망록] <3> 외무장관의 밀명을 받다

입력
2007.06.27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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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중국이 수교를 위한 비밀회담을 갖기로 했어요. 5월14,15일 이틀간 베이징에서 예비회담이 개최되는데 권 대사를 예비회담 대표로 임명합니다. 아무리 늦어도 연내 수교를 끝낸다는 목표로 권 대사가 보안과 준비를 철저히 하고 교섭을 시작해 주시오.”

이상옥 장관으로부터 한국과 중국의 수교문제를 논의할 예비회담 대표로 정식 통고 받은 날은 1992년 5월6일 수요일이었다. 그 무렵 국내는 12월 차기 대통령 선거를 향한 열풍이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할 때였다. 나라 밖으로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흑인 폭동으로 한국이민 사회가 초유의 불행에 시달리던 상황이었다.

이날 오후 2시30분부터 30분간 진행된 이 장관과의 면담은 나의 외교관 커리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장관은 한중수교 준비와 예비교섭 임무를 극비리에 맡기면서 앞으로 수교문제와 관련된 사안은 자신이 직접 지시하거나 또는 김석우(金錫友) 아주국장을 통해 전달하겠다고 설명했다.

이 장관은 무슨 불가피한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마침 5월10일이 부친의 생신이어서 고향에 다녀와야 한다고 얘기했더니 그 이외의 모든 일정은 비우고 고향 아버님이 병환 중이라 주로 시골에 가 있는 것으로 위장하라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 장관은 이어 외교안보연구원에 못 나가는 사정은 자신이 직접 공노명 원장에게 알리겠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당장 다음날부터 안기부 K차장의 도움을 받아 안가(安家)에서 예비회담 작업에 착수하라고 지시했다. 나를 도울 실무자는 신정승(辛正承) 당시 동북아 2과장 한 사람뿐이었다. 신 과장도 일단 병원에 입원한 것으로 가장, 병가를 내고 나를 돕기로 했다.

치밀하기로 소문난 이 장관은 베이징 한중외무장관 회담 당시의 중국측 제안 내용 및 배경을 상세히 설명해 줬고 앞으로 있을 수교 교섭의 일정은 물론 의제와 목표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지시했다.

이 장관은 당초 4월13일 첸치천(錢其琛) 외교부장으로부터 수교회담 제의를 받고 그 자리에서 나를 교섭대표로 염두에 두고 열흘 후인 22일로 면담 일정을 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날 이 장관이 청와대 보고 과정에서 수교 협상 구상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면담 일정은 5월 초로 보름 가량 연기됐다.

그 사연은 이렇다. 이 장관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중국 및 몽골 방문 결과와 앞으로 있을 한중수교협상에 대해 보고했다. 그런데 청와대 외교안보라인이 이 장관이 귀국하기도 전에 이미 김종휘 대통령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회담 수석대표로 건의해 대통령의 낙점을 받아놓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이 장관의 당초 구상에 변화가 불가피해진 것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별도로 거론하겠지만 한중수교 회담의 성격이 외무부를 중심으로 한 ‘외교당국자간 협상’이냐, 아니면 청와대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성격을 띤 협상이냐는 중요하고도 민감한 문제였다. 이 장관은 심사숙고 끝에 본회담에 앞선 예비회담과 권병현 차석대표 참석이라는 절묘한 해법으로 그 난제를 해결했다.

청와대의 결정을 따르는 동시에 첸치천 외교부장이 제의한 ‘외교당국자간 협상’방식을 지킴으로써 역사적인 한중수교를 정통 외교교섭으로 마무리 지으려는 외교수장으로서 이 장관의 고뇌 어린 결정이었다.

그렇다면 이 장관은 왜 나를 예비회담 대표로 낙점했을까. 이 장관의 회고록 ‘전환기의 한국외교’를 인용한다.

‘노태우 대통령에게 수교회담에는 실무 예비교섭이 선행되어야 하며 중국 외교부장으로부터도 수교교섭은 양국 외교당국자 간에 진행토록 하자는 요청이 있었음을 말씀 드리고 외무부 대사를 차석대표로 하여 청와대, 외무부 등 관계기관 실무자들로 대표단을 구성, 예비회담을 개시할 것을 건의하면서 예비회담을 맡게 될 차석대표에 권병현 대사를 지명하여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다 …. 권병현 대사는 주 미얀마대사와 부산시 국제관계 자문대사를 거쳐 외무부 본부대사로서 외교안보연구원에 사무실을 갖고 있어 언론의 시계 밖에 있었다는 점과, 또한 중국과 대만을 담당하는 동북아2과장과 아주국장을 역임하여 중국 관련업무 처리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 고려되었다.’

나는 장관실에서 나오자마자 곧 자하문 밖 부암동 효동빌라의 집으로 김석우 국장과 신정승 과장을 불렀다. 한중수교에 관한 이상옥 장관의 밀명을 받은 세 실무자가 갖는 첫 실무전략회의인 셈이었다. 여기서 암호명을 동해사업(東海事業)으로 붙였다.

대만과 북한은 각각 자국의 최대 우방국인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어디선가 논의하고 있다는 낌새를 맡고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이 사건을 예리하게 추적하고 있었던 때이다. 첫 모임을 마친 우리 셋은 집을 나와 효자동의 단골 음식점에서 소주를 반주 삼아 저녁을 들면서 최선을 다해 회담 준비를 하자고 다짐했다. 한중수교 비밀회담 준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권병현(한중문화청소년협회회장ㆍ전 주중국 한국대사)

■ 동북아2과 창설 땐 非인기부서…김하중·이태식 등 영입 '뒷날' 준비

장관실을 나서자 마자 어느새 내 마음은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고 있었다. ‘한중수교 교섭’ - 이는 직업외교관으로 한 우물만 파온 나의 인생에서 가장 해 보고 싶었던 꿈이었다. 나의 커리어는 외무부 동북아2과(중국과)의 창설을 비롯해 중국과는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지상목표로서 한중수교가 내 마음 한가운데에 항상 자리 잡고 있었는지 모른다.

중국에 대한 관심은 1969년 로스앤젤레스(LA) 부영사 시절 한 중국인 부인을 개인교사로 초빙하고, 버클리대학 스칼라피노(Bob Scalapino)교수와 존슨(Chalmers Johnson)교수를 찾아 중국 수업에 입문하면서 그 싹이 트기 시작했다.

72년 LA근무를 마치고 본부 아주국으로 돌아와 73년 동북아2과 창설멤버로 이지철 과장 밑에 차석으로 있다가 74년 2월에 제2대 과장을 맡게 됐다.

당시 지성구 아주국장이 동남아과장을 맡으라는 제의를 마다하고 초라한 신설과인 동북아2과장을 고집하던 기억이 새롭다. 대만과 중국(당시에는 중공)을 담당하던 동북아2과는 중국과의 교류는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라 시쳇말로 별 볼일 없는 부서였다. 당연히 인기도 없었다.

그 당시 동북아2과 직원들은 고려대 아시아문제연구소의 김준엽 소장 등 가능한 채널을 동원, ‘죽의 장막’ 너머 중국에 대한 정보와 자료를 모아 ‘중공정세’를 매월 발간하고 ‘등소평의 복권과 향후 전망’같은 정세분석을 상부에 수시로 보고하곤 했다. 비록 메아리 없는 일방통행식 업무였지만 꽉 닫힌 중국의 문을 바라보고 기다리면서 뒷날을 준비 해 나갔다.

하지만 동북아2과 멤버는 쟁쟁했다. 그 당시 군 복무를 마치고 복직한 김재섭 사무관(외교부 차관 후 주러시아 대사 역임)을 내가 직접 찾아가 영입하는데 성공했고 당시 여권과에 근무하던 김하중 사무관(현재 주중국 대사)과 이태식 사무관(현재 주미국 대사)을 삼고초려 해 영입해 왔다.

동북아2과가 오늘날 우리의 4강 외교에서 미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 대사를 배출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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