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삼성그룹의 신입 사원들이 연출한 매스게임이 인터넷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수많은 인간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특히 카드섹션으로 간단하나마 움직이는 동영상을 연출하고, 심지어 빛을 반사하는 금속성 표면의 질감까지 연출해내는 것을 보며, 그 기술적 정교함에 혀를 내둘렀다.
‘인민경제의 현대화 정보화’라는 북한의 구호는 기괴하다. 현대화의 구호가 매스게임이라는 전근대적 표현형식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의 미래를 외치는 삼성의 매스게임에도 이 첨단성과 낙후성의 모순적 결합이 보인다. 그래선지 네티즌들의 견해도 갈린다. “예술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찬탄이 있는가 하면, “전체주의 국가 같다”는 비난도 나온다.
사실 매스게임은 현대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현상이다. 내가 아는 한 아직 이런 문화가 일상에 살아있는 나라는 지구상에 딱 세 곳, 즉 북조선과 남조선, 그리고 일본뿐이다. 북조선이야 체제가 워낙 전체주의적이라서 그런다 치고,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시장경제와 자유주의 체제를 채택한 남한과 일본에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좀 의아한 일이다.
일본부터 보자. 언젠가 독일 TV에서 우연히 일본 미쯔비시 그룹의 사원들이 연출하는 화려하고 웅장한 매스게임을 본 적이 있다. 알고 보니, 그 그룹에서 일하는 사원들은 동시에 ‘창가학회’로 알려진 종교집단의 신도라고 한다. 통일교처럼 기업과 종교집단이 일체를 이루는 셈이다. 미쯔비시의 매스게임은 아마도 종교집단 특유의 소속감과 관련이 있을 게다.
삼성에서는 “사원들의 소속감을 기르기 위해” 매스게임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국내외의 다른 기업들은 굳이 매스게임 같은 것을 안 해도 잘만 운영해나간다. 그렇다면 삼성에서 매스게임을 계속하는 것은 혹시 정말로 효과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그렇게 믿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튼 이 미신의 바탕에는 ‘시스템’을 바라보는 어떤 전체주의적 발상이 깔려 있다.
전체주의 조직은 매스게임을 좋아한다. 왜? 개인보다는 전체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매스게임에서 개인은 자체로는 의미를 갖지 못하고 그저 전체가 만들어내는 그림 속의 픽셀이 된다. 총통이나 수령을 ‘두뇌’ 삼아, 인민을 두뇌의 명령에 따르는 수족으로 만드는 것이 전체주의자의 취향이고 이런 미감이, 취향이 자연스레 예술적으로(?) 표출된 것이 매스게임이다.
전체주의 조직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시스템이다. 이런 시스템에서 중요한 결정은 ‘두뇌’에 해당하는 엘리트들이 내리고, ‘수족’에 해당하는 이들은 그 명령에 따라 신체를 움직인다. “한 명의 천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삼성의 철학이 그저 우연일까? 그룹에서 미래상을 그리는 천재는 매스게임에서 전체상을 그리는 기획자에 해당한다.
톱다운(top down) 시스템에서 창의성은 ‘위’에서 나온다. 그것은 일반인에게 없는 능력을 가진 한 사람, 즉 천재의 몫이다. 나치독일에서 총통은 ‘정치예술의 천재’였고, 북한에서 수령은 ‘군사예술의 천재’였다. 남한의 어느 소설가는 박정희를 “500년 만에 한번 날까 말까 한 천재”라 불렀다. 여기서는 기업이든 국가든 전체의 운명이 이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
이런 조직이 얼마나 창의적일 수 있을까? 톱다운 시스템에서 새로운 것은 오직 두뇌집단에게서만 나온다. 조직의 창의력이 몇몇 사람의 상상력의 한계에 갇혀 버리는 것이다. 사실 ‘천재’라는 말은 18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소산으로, 오늘날에는 미학에서도 용도 폐기한 개념이다. ‘천재’라는 말로 신비화하지 않고도 창의성을 설명해주는 현실적인 개념이 있다.
가령 인공생명에서 세포기계는 철저하게 보텀업(bottom up) 시스템으로 구축된다. 세포들은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가운데에 더 진화한 형태로 발전해 간다. 이미 있는 세포들이 유전 정보의 교환(mutation)을 통해 아직 없는 형태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창의성은 비범한 하나의 세포가 아니라, 평범하기 그지없는 세포들의 상호작용에서 나온다.
세포와 세포가 만나서 무엇이 출현할지는 미리 예측할 수가 없다. 이를 체계이론에서는 ‘창발’(emergence)이라 부른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에 새로운 게 필요 없고, 비범한 것을 만드는 데에 비범한 것이 필요 없다. 낡은 것을 입력했는데 새로운 것이 출력되고, 평범한 것을 입력했는데 비범한 것이 출력된다. 이것이 ‘창발’을 일으키는 시스템의 특성이다.
매스게임은 어떤가? ‘창발’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거기서도 개별 세포들은 서로 협력해 자신을 뛰어넘는 전체 그림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그림은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다. 매스게임과 같은 종류의 시스템에서는 입력을 그대로 출력으로 얻을 뿐이다. 굳이 게임을 해보지 않아도 거기서 어떤 그림이 나올지 벌써 뻔하다.
‘천재'를 말하는 것은 그래도 미래의 생산력은 창의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삼성에서 알고 있다는 뜻일 게다. 그게 그나마 삼성이 앞서 갈 수 있었던 요인일 게다. 하지만 창의력을 얻는 데에 ‘천재’에게 의존하는 것, 그것이 삼성이라는 시스템의 한계다. 노조 조차 꿈꾸지 못하게 하는 조직에서 억지로 쥐어짜는 상상력에는 미래가 없어 보인다.
삼성측은 “이 행사가 시작된 지 벌써 20년이나 넘었고 신입사원들에게 소속감을 심어주는 의미 있는 자리”라고 밝혔다고 한다. 교육을 담당한 이들이 강산이 두 번 바뀌는 긴 세월 동안 그 낙후된 프로그램을 기계적으로 반복해 왔으면서 아무 문제도 못 느낀다는 것. 그게 매스게임 조직의 문제가 아닐까?
●'창발'의 매력/ 범재들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비범함
미립자들이 합쳐져 원자를 이룬다. 예를 들어 수소 원자는 미립자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미립자들 각각에는 수소라는 원소의 특성이 들어 있지 않다. 수소가 산소를 만나면 물이 된다. 물은 분명히 수소와 산소로 이루어져 있지만, 물의 속성은 수소에도 산소에도 들어 있지 않다. 인간의 지성은 뉴런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뉴런들 각각에는 지성이 들어 있지 않다.
이런 현상을 철학과 체계이론, 자연과학에서는 '창발'(emergence)이라 부른다. 창발이란 단순한 요소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어떤 새로움이 급작스럽게 출현하는 것을 말한다. 창발이 일어나면, 전체는 부분들의 산술총합을 뛰어넘는 특성을 갖게 된다. 무기물이 복잡한 구조를 가진 생명체로 진화해 온 것도 창발의 결과다.
창발은 생명체에만 있는 게 아니다. 가령 인터넷의 진화는 어느 한 천재의 디자인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개개의 사이트가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사이트들 사이에 링크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전체를 디자인하는 사람이 없어도, 인터넷은 스스로 알아서 점점 더 높은 차원으로, 그리하여 오늘날 web 2.0의 다중지성으로 진화해 왔다.
옛 사람들은 무기물에서 생명이 나온 것이 '신'이라는 지성적 존재의 디자인이라 믿었다. 하지만 창발은 초월적 디자이너의 천재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평범한 요소들의 상호작용만으로 새로움을 출현시키기 때문이다. 비범함을 만드는 데에 굳이 비범함이 필요 없다는 것. 여기에 창발의 매력이 있다.
조직의 창의성을 높이는 것은 천재들의 머릿수를 확보하는 문제가 아니다. 조직 자체를 창발에 적합한 시스템으로 바꿀 때, 사회는 천재에 의존하지 않고도 창의적일 수 있다. 한 명의 천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리는 게 아니다. 천재 역시 10만 범재들의 복잡한 상호작용 속에서, 그것의 효과로 태어나는 것이다.
떼를 지어 날며 시시각각 하늘에 황홀한 그림을 그리는 새들을 생각해 보라. 이 그림에는 작가가 없다. 새들은 지도자의 명령 없이 그저 "서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장애물을 피하라"는 원리에 따라 날아다닐 뿐이다. 그런데도 그것만으로도 예측할 수 없는 장관을 연출한다. 이를 매스게임의 그림과 비교해 보라.
문화평론가ㆍ중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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