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과 협정문 공개 과정에서 한 목소리로 ‘철저한 검증’을 외쳤던 정치권이 검증을 외면하고 있다. 협정문 서명(30일)이 임박했는데도 온통 대선 정국에만 관심이 쏠려 활동에 소극적인데다 검증 시스템마저 갖추지 못한 탓에 정부에 무기력하게 끌려다니는 모습이다.
24일 본보 확인결과 20개 국회 상임위원회 및 특별위원회 가운데 한미 FTA와 직접 관련된 10개 상임위 중 지금까지 FTA 청문회를 개최했거나 일정을 잡은 상임위는 단 2곳 뿐이다.
보건복지위가 지난 18일 청문회를 열었고, 문화관광위는 같은 날 청문회를 열었지만 김명곤 전 문화부 장관 등 주요 증인들이 출석하지 않아 무산됐다. 문광위는 27일 청문회를 다시 열 계획이지만 김종훈 한미 FTA 수석대표가 추가협상 때문에 출석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 반쪽 청문회 가능성이 크다.
한미 FTA 핵심 상임위인 통일외교통상위는 국회에 한미 FTA 비준 동의안이 제출된 후에 청문회 일정을 잡는다는 여유 있는 입장이고, 농림해양수산위는 7월 이후 청문회를 열 계획이다.
특히 FTA와 밀접한 산업자원위는 지난 14일 전체회의에서 아예 청문회를 열지 않기로 결정했다. 무소속 임종인 의원은 “5월과 6월에 두 차례나 청문회 개최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의원들이 공부를 안 해 관심이 없거나, 처음부터 찬성하거나, 청와대 눈치를 보는 통에 전혀 검증이 안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산자위는 한미 FTA 17개 분과 중 좁게는 6개, 넓게는 13개 분과와 관련돼 있는 상임위다.
이 밖에 재정경제위, 정무위, 환경노동위, 법제사법위, 과학기술정보통신위 등 5개 상임위24일 현재 한미 FTA 청문회 개최를 검토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청문회 뿐 아니다. 국회는 이달 말 활동이 끝나는 ‘한미 FTA 체결 대책 특별위원회’시한연장 안건을 지난 20일 본회의에 상정했으나 통과시키지 못했다. 반대 의견이 많아서가 아니라 단지 정족수가 모자라서였다.
반면 미국은 무역대표부(USTR)가 지난달 25일 협정문 공개와 함께 27개 분야별 민간 자문위원회의 평가보고서를 내놓았다.
또 독립기관인 국제무역위원회(ITC)는 20일 업계 관계자는 물론 이태식 주미대사까지 참석시킨 가운데 청문회를 열어 한미 FTA 협정문을 놓고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민간 자문위와 ITC의 평가보고서는 법에 따라 반드시 대통령과 의회에 제출돼야 하며, 의회는 이를 토대로 비준 동의 여부를 결정한다.
FTA에 무기력한 국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이 지난해 시민단체와 함께 ‘조약체결절차법안’, 즉 통상절차법을 만들어 발의했다. 하지만 지난 21일 법안 심사를 위해 열릴 예정이던 통외통위 법안심사소위 첫 회의는 무산되고 말았다. 임종석 의원의 열린우리당 탈당으로 공석이 된 소위 위원장 문제가 정리되지 않아서였다.
이렇듯 검증에 무기력한 국회가 앞으로 ‘비준 동의’라는 무기를 제대로 활용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이다. 강수경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간사는 “정부의 ‘통상 독재’가 1차적 문제지만 국회가 이를 제어할 의지가 부족하다는 게 더 큰 문제”라며 “현 상황을 보면 당초 국회가 정부의 거수기 역할만 할 것이라는 우려가 괜한 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진성훈 기자 blueji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