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취임한 한덕수 총리를 상대로 대정부 질의가 뜨겁게 달아오르던 4월 9일 국회 본회의장. 질의를 마친 한나라당 김희정 의원은 한 총리에게 자처럼 생긴 물건을 선물로 건넸다. 유척(鍮尺)이었다.
쇠로 만든 유척은 한 자 한 치의 길이를 정확히 표시한 조선시대 표준자. 왕이 암행어사를 임명할 때 마패와 함께 하사하는 물건이다. 지방 수령들이 엉터리 측정기구로 세금을 많이 거둬서 국가에는 정량만 바치는 행위를 가려내는 도구였다. 김 의원은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해 달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 길이, 부피, 무게의 기준이 되는 도량형(度量衡)이 다르면 큰 혼란이 벌어진다. 미국과 캐나다 국경지대에서는 유난히 교통사고가 잦다. 속도를 마일로 계산하는 미국의 운전자가 미터로 표시된 캐나다의 속도제한 표지판을 착각해 과속을 하기 때문이다.
1999년 미국의 화성 탐사선이 궤도에 진입하다 폭발한 사건은 어처구니없게도 야드로 설계된 제원을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미터로 착각해 발생했다. 2001년 6월 중국 공항에서 국내 항공사 화물기가 추락한 원인도 비슷하다. 중국의 고도단위는 미터인데 순간적으로 피트로 생각한 조종사가 서둘러 하강을 시도한 게 문제였다.
▲ 미터(m)와 킬로그램(㎏)을 기본 단위로 하는 미터법은 1870년 프랑스에서 시작돼 국제 표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적지 않은 나라가 독자적인 도량형을 병용한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인치, 야드, 파운드의 야드파운드법이 미터법보다 널리 쓰인다. 국내에 미터법이 도입된 시기는 1902년. 대한제국의 1호 법률이 바로 도량형법이었다. 미터법은 일제가 도입한 관ㆍ근ㆍ동 같은 척관법과 병용하다가 1961년부터 법정계량 단위로 통일됐다. 83년부터는 미터법 표기가 의무화하면서 다른 표기는 불법이 됐다.
▲ 내달부터 정부가 미터법이 아닌 표기 가운데 평(坪)과 근(斤) 사용을 단속한다. 아파트의 경우 평뿐 아니라, ’형’ ‘타입’ 같은 유사 표현은 물론 ㎡와 병행 표기하는 것도 제재한다. 그램 대신 근을 사용하는 금은방도 마찬가지다. 가전제품이나 골프장 등에서 널리 쓰는 인치, 야드는 이번 단속에서 제외됐다.
충분한 홍보 없이 불쑥 단속에 나선다는 비판도 있지만, 정부도 매우 조심스러운 모습이다. 오랜 기간 국민 생활 속에 뿌리 내린 관행을 바꾸기는 그만큼 쉽지 않다. 마찰은 최소화해야 하지만, 도량형을 국제기준에 맞추는 작업은 불가피하다.
배정근 논설위원 jkp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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