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 주디스 허먼 지음ㆍ최현정 옮김 / 플래닛 발행ㆍ456쪽ㆍ1만6,000원전쟁 피해자·강간피해 여성 등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가 본 고통과 피해
현대 사회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전쟁, 정치적 압제, 대형재난 등의 사건은 현대인에게 공포, 무력감, 분노를 야기한다. 때로 사람들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는데 이런 증상을 ‘트라우마’라고 한다. 의학적으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라 부르는, 일종의 정신 질환이다.
전쟁 피해자, 강간피해여성, 학대아동 등을 20여년간 관찰해온 미국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인 주디스 허먼의 <트라우마> 는 트라우마가 어디에서 기인하고, 환자들은 어떤 고통을 받고있으며, 어떻게 치유해왔는가를 깊이 있게 다룬다. 트라우마>
책에 따르면 트라우마는 여러 가지의 기이한 형태로 나타난다.
근친상간의 피해를 입은 여성이 고속도로에서 남자 트럭 운전수와 거친 추월 게임을 하거나, 잔인한 전투를 치른 퇴역 군인이 길거리에서 장난감 병정이나 장난감 기관총을 갖고 노는 아이들을 보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그 예다. 전쟁과 성폭력이 주로 트라우마를 불러오지만 지은이는 아동학대의 심각성도 비중 있게 다룬다.
아동기에 경험한 반복적인 폭력이 몸과 마음에 평생 짊어져야 할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학대자에게 자신의 몸에 대한 처분을 맡긴 아동은 수면, 섭식, 배설을 하는데 혼란에 빠지는 등 신체적 고통을 겪고, 자신을 보호할 수단이 없기에 ‘운명이 자신을 버렸다’고 여겨 자기비하에 빠지는 등 정신적 타락을 겪는다.
오랜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트라우마의 사례를 제시한 점이 탁월하다. 거기에 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권력관계, 폭력의 메커니즘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책의 가치를 높인다. 지은이는 역사적으로 권력을 쥐고 있던 폭력의 가해자들이, 폭력을 행한 사실을 은폐 혹은 침묵했고, 은폐에 성공하지 못하면 ‘피해자가 거짓말을 한다.
피해자가 초래한 일이다. 어떤 사건이든 과거는 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식으로 합리화하기에 급급했다고 비판한다. 성폭행 사건에 대한 재판에서부터 크게는 국가폭력에 관한 재판까지 가해자의 발뺌은 반복돼 왔다.
저자는 폭력의 피해자들이 대부분 여성이었기 때문에, 트라우마 치료의 역사가 여성의 권리 향상과 궤를 같이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트라우마 치료 연구는 19세기말 시작했으나 대체로 지지부진했다.
당시 프로이트는 자신의 여성 환자들이 유년시절 성폭력, 학대 등의 기억으로 고통스러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여성이 열등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자신의 남성중심적 학설을 고수하기 위해 트라우마 치료 연구에 신경을 쓰지않았다. 오랫동안 지지부진하던 치료방법 연구는 여성해방운동이 활발해진 1970년대부터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본격화했다.
성매매여성지원센터에서 활동했던 역자는 “피해자의 역사를 재건하는 책”이라며 “폭력의 피해자가 ‘복수’가 아닌 ‘정의 추구’로 심신의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사회적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