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항쟁 이후 우리는 네 번의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네 번의 대선은 각기 그 성격이 달랐다. 1987년 대선이 군사독재를 종식시켰다면, 1992년 대선은 군부의 정치적 개입을 마감시켰다. 1997년 대선은 외환위기 와중에 치러졌으며, 2002년 대선은 월드컵 거리응원과 촛불시위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됐다.
돌아보면 선거는 흐름이자 구도다. 그 흐름은 민주화라는 시대정신이 만들어냈으며, 구도는 산업화세력 대 민주화세력의 대결이었다. 이 구도 속에서 정치적 세력들의 이합집산, 지역투표와 계급투표가 작동했다. 어떤 경우는 제3후보가 선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고, 다른 경우는 지역 간 연대가 분수령이 되기도 했다.
● 시대별 대선흐름 정확히 읽어야
이번 대선의 흐름은 민주화 시대의 종언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민주화는 여전히 미완의 과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국민 다수의 시선에는 민주화 시대가 지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더불어 중도세력이 집권한 지난 10년간에 대해 국민들은 일종의 애증 병존을 갖고 있다.
민주화 시대는 하나로 이뤄져 있지 않다. 여기에는 시대정신으로서의 민주화, 정치세력으로서의 민주화세력, 사회적 지반으로서의 시민운동과 민중운동, 에토스로서의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열망이 결합해 있다.
우리 현실을 돌아볼 때, 민주화는 이제는 낡은 듯한 느낌을 안겨주고, 민주화세력은 분화돼 있으며, 사회운동 동력은 적잖이 약화돼 있고,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에는 시장주의와 개인주의가 맞서고 있다. 바야흐로 민주화 시대는 황혼 속에 놓여 있다.
문제는 무엇이 민주화 시대를 대신하고 있느냐는 데 있다. 나는 그것이 세계화 시대라고 생각한다. 1997년 외환위기를 통해 가시화한 세계화는 민주화라는 구심력을 이완시키는 원심력으로 작용해 이제는 민주화를 압도하고 있다.
고용 없는 성장의 가시화, 국제 금융자본의 영향력 강화,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대, 외국인 노동자의 증대, 국가적 아젠다로서의 고령화 및 청년실업의 등장, 세계주의와 개인주의 문화의 증가는 세계화 시대의 구체적인 징표들이다. 이 과제는 민주적 개혁 이상의 해법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민주화세력을 당혹케 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여론조사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신개발주의를 내세우는 이명박 후보나 신자유주의를 강조하는 박근혜 후보가 높은 지지를 얻고 있는 일차적 이유는 이들이 바로 세계화 시대의 개막이라는 흐름을 타고 있다는 데 있다. 국민 다수가 원하는 것은 민주화를 넘어서는 의제들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자 대안이다.
● 이제 사회통합적 세계화 지향을
문제의 핵심은 신개발주의나 신자유주의가 세계화시대가 가져온 과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세계화는 국가간 기업간 경쟁을 강화함으로써 효율성을 높이지만, 바로 그 경쟁의 논리는 사회 양극화를 강화하고 우리 삶을 황폐하게 만든다. 이 점에서 민주화세력에게 요구되는 것은 박정희 시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신개발주의나 사회 양극화를 강화시킬 배제적 신자유주의와 맞설 수 있는 사회통합적 세계화, 지속 가능한 민주주의의 패러다임이다.
흐름을 정확히 읽지 못하면 구도를 제대로 만들어낼 수 없다. 대통합도 좋고 후보 간 연대도 좋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민주개혁세력의 새로운 콘텐츠, 패러다임, 시대정신이다. 그것을 갖추지 못한다면 민주화세력은 민주화 시대의 종언과 함께 쓸쓸하게 퇴장하게 될지도 모른다. 일대 분발이 요청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좋은정책포럼 운영위원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