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건설회사 사장이 꿈이던 A씨(40). 직장 생활 10년간 모은 저축과 친지들로부터 투자자금을 받아 건설회사를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평생 소원이 출발 단계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2년전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금고 이상 실형 선고를 받고, 3년이 지나지 않으면 건설업 등록을 할 수 없다’는 규정이 문제였다. A씨는 “교통사고 낸 건 잘못이지만 교통사고와 건설업이 무슨 관계가 있냐”며 “이런 법은 아프리카에나 있을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A씨는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강조하려고 ‘아프리카에나 있는 법’이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놀랍게도 이는 실제로도 정확한 표현이다. 세계은행은 매년 전세계 대부분 나라의 ‘기업하기 좋은 환경(Doing Business)’을 평가해 발표하는데, 세계 11위 경제대국인 대한민국의 2007년 창업 환경 순위는 아프리카 수준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기업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총 12단계의 절차를 밟아야 하고, 최소 22일이 필요하다. 또 창업비용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15%에 달하며, 법정 최소자본금은 1인당 소득의 300%에 육박한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창업분야 국제비교에서 조사대상 175개국 가운데 116위로 후진국 수준에 머물렀다.
한국과 비슷한 창업환경을 갖춘 나라는 세계 주요 대륙 가운데 아프리카에 몰려 있는데, 마다가스카르와 케냐, 우간다, 나이지리아가 대표 국가다.
1인당 GDP가 각각 1,500달러와 908달러인 우간다(107위)와 마다가스카르(110위)는 한국을 앞섰고, 정정(政情) 불안으로 한국인을 비롯해 외국인 납치사건이 빈발하는 나이지리아가 그나마 118위로 한국을 뒤쫓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세계은행 조사에서 우리나라의 전체 순위는 23위였다”며 “이는 창업규제가 한국 경제의 활력을 막는 핵심적인 규제임을 뜻한다”고 말했다.
그는 “역대 정권마다 규제개혁을 약속했지만, 현장에서 기업인들이 실감하지 못하는 것은 창업 분야가 규제의 사각지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세계은행 조사 항목 가운데 우리나라는 폐업(11위), 계약이행(17위), 융자여건(21위), 교역절차(28위) 등 대부분에서 상위권이지만 창업(116위), 고용ㆍ해고(110위) 등 일부 특정 분야 경쟁력이 현저히 떨어져 전반적인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창업ㆍ노동 분야의 규제만 이뤄지면 우리나라 기업 환경은 순식간에 선진국 수준으로 진입하게 되는 셈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창업 분야의 경쟁력이 시간이 갈수록 퇴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재계 관계자는 “세계은행 조사에서 한국의 2006년 순위(116위)는 2005년(97위)과 비교하면 19계단이 밀려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006년 창업규제가 강화된 것은 아니지만, 한국이 정체 상태에 머문 반면 다른 나라는 창업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해 상대 순위가 하락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계 최고수준의 강력한 창업규제는 결국 일자리 감소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강력한 규제 때문에 우리나라 기업들의 연도별 공장건립 건수는 2003년 8,972건에서 지난해에는 6,144건(추정)으로 31.5%나 감소했다.
또 제조업 신설법인도 2003년에는 1만2,445개에서 2004년 1만1,078개, 2005년에는 9,435개로 감소했다. 1개 제조업체에 평균 24명이 근무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 제조업이 창출하는 일자리가 최근 3년간 7만2,000여개나 감소한 것이다.
S그룹 관계자는 “일본이 최근 법정 최소 자본금을 없애는 등 창업관련 규제를 대폭 풀어 창업천국 만들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선 벤처기업주들이 부도를 낼 경우 본인만 재산상의 피해를 본다”면서 “한국에선 지급보증이나 연대보증을 요구하는 구시대적 규제로 인해 창업주의 친인척과 친구 등이 부도연좌제에 줄줄이 얽혀 재산을 날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영에 실패하면 기업주는 물론 가족전체가 패가망신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한 것이다.
한국 경제의 활력 회복을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창업관련 분야에서 대대적인 규제완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산업연구원 양현봉 연구위원은 ‘창업절차 간소화 및 창업비용 절감방안’ 보고서에서 이미 상법 개정안에 포함되기는 했으나 ▦최저자본금 제도의 철폐 ▦법인설립 서류의 표준화 및 절차 간소화 ▦공증서류 간소화 및 공증기관의 다양화 ▦주금(株金) 납입보관 증명서 발급 관련 제출서류 간소화 ▦법인설립 등기신청에 따른 채권구입 면제 등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또 기존 기업이 자유롭게 새로운 사업분야에 진출할 수 있도록 대기업의 계열사 출자를 막는 규제(출자총액제한제도 완화와 의료ㆍ통신ㆍ환경 분야에 존재하는 진입장벽의 해제도 긴요하다는 게 중론이다.
조철환 기자 chcho@hk.co.kr
■ 일본은 창업천국
일본 경제가 ‘10년 장기불황’을 극복하고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는 사업 아이디어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기업을 만들고, 사업할 수 있는 ‘창업천국’이 됐기 때문이다. 일본은 1945년 2차 대전 패전 이후 내려온 각종 오래된 창업관련 규제를 지난 10년간 철저하게 개혁했다.
일본은 창업천국으로 변신하기 위해 크게 두 가지 방향의 규제 개혁을 실시했다. 우선 밑천이 없더라도 아이디어가 좋은 사람이 창업에 나설 수 있도록 신규 창업의 장벽을 완전히 허물었다.
대표적인 것이 최저자본금의 철폐였다. 2000년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 상법은 주식회사를 설립하기 위해서는 최소 1,000만엔의 자본금을 금융기관에 예치하라는 조항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의 경쟁국가가 창업 촉진을 위해 최저자본금 조항을 없앤 것을 본받아, 2003년 특례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사실상 규제를 철폐했다. 이어 2006년에는 새로운 회사법을 제정해 1엔만 있으면 누구나 회사를 만들 수 있도록 했다.
두 번째 개혁은 기존 기업이 신규 시장에 신속하게 뛰어들 수 있도록 관련 규제를 정비한 것. 가장 먼저 취해진 조치는 지주회사 전환을 용이하게 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1999년 상법 개정을 통해 주식이전 및 교환제도를 도입했다. 지주회사로 전환하고 싶어도, 자회사 지분을 사들일 만큼의 현금이 없을 경우 모 회사가 주식교환 또는 이전을 통해 지주회사로 전환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준 것이다.
2001년에는 회사 내부의 사업부문을 별개 회사로 독립시켜 사업재편을 쉽게 하도록 ‘회사분할제도’를 도입했다. 이전에는 기업이 현물출자 방식으로 분사할 경우에는 관할 법원의 검사 및 채권자 동의 등의 절차를 거쳤으나, 이런 절차를 대폭 완화했다. 또 자사주를 지렛대로 기업 분할이 이뤄지도록 하기 위해 자사주의 취득, 보유 및 처분에 관한 규제도 철폐했다. 이에 따라, 일본 기업의 회사분할 제도 이용건수는 2001년 600건에서 2005년에는 1,200여건으로 급증했다.
기업재편 과정에서의 세금부담도 대폭 완화했다. 기업재편에 따른 자산이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양도이익 등에 대한 세금 부담을 6분의1 수준으로 낮췄다. 또 신규 기업이 부담하는 면허세 및 등록세 세율도 종전 0.7%에서 0.15%로 인하하는 한편, 결손금 이월을 종전 5년에서 7년으로 연장했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 생태계가 건강하려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보유한 신규 기업의 진입이 촉진돼야 한다”며 “규제제국에서 창업천국의 바뀐 일본의 10년은 한국 경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조철환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