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황정민(37)은 참 고지식하다. 주변에서 아무리 추켜세워도, 평론가나 관객이 무슨 타이틀을 갖다 붙여도 미동이 없다. “배우는 연기만 열심히 하면 그만이고, 작품을 고르는 기준은 오직 시나리오”라고, 툭 던지는 그의 얘기엔 진심이 담겨 있다. 스스로를 ‘온리(only) 배우’라는 이 우직한 사내의 얼굴에 <너는 내 운명> 의 순애보 석중의 표정이 포개진다. 너는>
그래서 <달콤한 인생> 의 백 사장처럼, 레이저광선을 뿜을 듯 사이키델릭한 눈빛의 황정민을 발견하는 건 낯선 즐거움이고, 쉽게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다. 그가 21일 개봉하는 공포영화 <검은집> (감독 신태라)에서 사이코패스(Psychopath)에 맞서는 심약한 보험조사원으로 변신했다. 검은집> 달콤한>
“<달콤한 인생> 의 백 사장 같은 ‘센’ 연기가 오히려 쉬워요. 이번 역할은 리액션(다른 배우의 대사ㆍ행동에 반사적으로 나오는 연기)을 통해 사이코패스라는 극단적 인간의 공포를 드러내야 했기 때문에 훨씬 어려웠죠. 그래서 더 매력을 느꼈던 캐릭터였어요.” 희로애락이 나타나지 않는 표정으로 엽기적 살인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 역할이 더 끌리지 않았냐고 묻자 황정민은 손을 내저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얘기’에요. 배역도 결국 얘기의 흐름 속에 있는 거니까요. 그 얘기가 마음에 들면, 난 어떤 역할이든 개의치 않아요.” 달콤한>
그러나 ‘황정민 최초의 스릴러’에서 황정민 만의 불가해(不可解)한 에너지가 보이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다. 그런 실망감을 눈치 챘을까,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뭣하지만…”이라며 자신의 에너지를 숨겨 놓은 곳을 슬쩍 가르쳐 줬다. “마지막 부분 작은 공간에 갇혔을 때, 범인의 칼이 문틈으로 들어 오잖아요. 그 때의 내 표정, 어마어마한 공포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범인을 이해하고 싶어 갈망하는 양면적 심리, 그 장면이 제일 마음에 들었어요.”
스타라고 불리는 것을 아직도 어색하게 여기지만, 황정민은 티켓파워를 지닌 몇 안 되는 ‘브랜드 배우’가 됐다. “영화계 전체를 위해서라도 흥행이 될 만한 영화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묻자 황정민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난 일개 배우일 뿐이에요. 내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어요. 대본을 통해 관객과 얘기하고픈 부분이 있으면 하고 아니면 마는 것, 그것이 내가 배우인 이유에요. 투자자의 역할, 감독이 고민할 부분까지 배우에게 떠넘겨서는 안 돼요. 그럴수록 영화는 ‘후지게’ 나와요.”
그는 ‘온리 배우’의 자세가 어릴 때(그는 대학로 시절을 ‘어릴 때’라고 부른다)부터 몸에 밴 것이라 했다. “때론 관객이 없어 공연을 못하고 어떨 때는 너무 많아 그냥 돌려보내고… 그러면서 깨달았어요. 나는 어떤 상황에서건 무대에 서 있는 배우라고. 그것만 생각하면 되는 거라고.”
나쁘게 보자면 ‘꽉 막힌’ 배우지만, 이런 고지식함이 황정민의 매력이다.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의 눈빛에서 때로 섬뜩한 레이저광선이 나오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책을 좋아하는 그는 <검은집> 작업을 마친 뒤 10권을 샀다고 했다. “법정 스님의 책 같은, 삶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 좋아요. 잔잔한 감동과 성찰의 기회를 소설 같은, 그런 영화를 하고 싶어요.” 검은집>
● <검은집> 은 선천적인 전두엽 이상으로 죄책감과 동정심 같은 인간의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이코패스’의 존재를 공포의 대상으로 삼은 스릴러. 동생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을 품고 사는 보험조사원 전준오(황정민)는 자신이 맡은 보험사기꾼이 사이코패스임을 알게 되고, 끔찍한 범죄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검은집>
사이코패스라는 색다른 소재를 선택했지만 공포를 자아내는 영화적 요소들은 히치콕적인 고전 호러영화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느낌이다. <양들의 침묵> 에서처럼 사이코패스 캐릭터 자체에 공포를 담지 못하고, 피칠갑이 된 무시무시한 세트에 관객들의 시선을 붙잡아 둔다. 양들의>
유상호기자 sh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