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 5명의 영세업체를 세계 3위 업체로 키우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업종이 비단 반도체나 자동차 같이 각광 받는 제품이 아닌 길이를 재는 ‘줄자’라 하더라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줄자 제작업체인 코메론의 강동헌(51) 대표가 이런 경우다. 코메론은 현재 미국의 스탠리, 일본의 다지마에 이어 세계 3위의 줄자 제작업체로 인정 받고 있다. 매출의 70%를 해외 80여 개국에 수출할 정도로 글로벌한 강소(强小) 기업이다. 28년 동안 줄자에만 매달려 온 외길 인생의 결실이다.
■ 세계를 누비는 줄자의 꿈
1985년 강 대표는 ‘코메론’을 울며 겨자먹기로 떠안아야 했다. 고혈압이 심했던 아버지가 강 사장과 형에게 물려준 회사가 3년 만에 빚만 남게 되면서 형마저 백기를 들었다. 군 제대 후에 생산쪽에서만 줄곧 일했던 그로서는 암담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는 국내 최초의 한국산 줄자인 ‘코메론’ 브랜드 만은 꼭 지키고 싶어 마음을 다잡고 경영 전선에 뛰어들었다.
본래 강 사장의 부친 강의조(86) 전 대표는 1974년 절연테이프 업체를 운영했었다. 부친은 당시 테이프 재료인 유리섬유가 온도에 따라 늘어나거나 줄지 않는다는 특성에 착안, 줄자 제작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각고의 노력 끝에 한국산이라는 뜻의 ‘코메론’이라는 자체 브랜드를 만들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DIY(Do It Yourself) 문화가 발달하지 않아 수출에 주력, 아이티를 비롯해 뉴질랜드, 호주 등에도 납품을 막 시작하려던 시기였다.
더구나 부친이 꿈꿨던 유리섬유재 줄자를 세계에서 처음 개발한 상황이어서 그는 결코 코메론을 저버릴 수 없었다.
경영에 나서면서 강 대표는 직원들을 불러 모아 놓고 “남들이 다 만드는 건 이제 그만 만들자”고 전격 선언했다. 그 이후 창의적인 제품을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 회의가 하루가 멀다 하고 열렸다. 직원과 함께 밤을 새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렇게 모인 아이디어가 제품에 적용되면서 코메론표 줄자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소의 허리 둘레를 재면 몸무게가 저절로 계산되는 줄자에서, 나무 둘레를 재면 나무의 나이가 측정되는 줄자 등 아이디어 상품들이 쏟아졌다.
■ 허리케인에 날아간 꿈
코메론은 1990년 까다롭기로 소문난 일본산업표준(JIS)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JIS획득은 일본 업체를 제외하곤 외국 업체로는 처음이었다. 점차 이름이 알려지면서 미국, 일본 등지로의 수출길도 열렸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중소기업이 만든 줄자가 선진국 시장에 진입하기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줄자를 자주 쓰는 장인들은 본래 자신이 쓰던 브랜드나 제품을 잘 바꾸지 않는 경향이 있어 더욱 그랬다.
일본 시장은 그나마 JIS를 획득해 자체 브랜드 수출이 가능했지만, 미국 시장은 만만치 않았다. 그는 결국 눈물을 머금고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 납품을 선택했다.
“하청업체의 비운을 맛보지 않기 위해 자체 브랜드까지 만들었는데 시장 개척을 위해선 어쩔 수 없더군요. 그나마 줄자 표면에 미세하게 ‘KOMELON’이라는 문양을 새겨 넣어 위안을 삼았습니다.”
브랜드에 대한 강 대표의 애착은 미국시장 납품 7년째인 1997년에 또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미국업체가 걸핏하면 가격을 깎아 달라고 요구하자 자체 브랜드 수출을 병행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
하지만 자칫하면 괘씸죄에 걸려 거래가 끊겨 400만 달러가 날아갈 수도 있었다. 거기에 환란까지 닥쳐 국내 상황도 여의치 않았다.
그는 고심 끝에 아예 OEM 납품을 모두 끊고 자체 브랜드 수출만을 하기로 결정했다. 당장은 힘들더라도 멀리 보자는 생각이었다. 이후 위스콘신주 밀워키에 미국 현지 법인을 세우고, 월마트 로우즈(LOWE’S) 등 대형마트와 계약을 맺으면서 미국 입성 준비를 순조롭게 해 나갔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은 악재가 터졌다.
1998년 미국을 강타한 허리케인이 창고에 보관해 두었던 제품들을 모조리 휩쓸고 지나가 버렸다. 강 대표는 넋을 잃었고, 직원들은 미국 철수를 기정사실화했다. 절망 뿐이었다.
■ 종합수공구 업체를 향해
하지만 하늘은 그를 버리진 않았다. 허리케인 피해지역을 취재 중이던 미국 방송사 CNN 촬영헬기에 코메론 현지법인의 모습이 잡히면서 상황이 급반전한 것이다. CNN을 통해 코메론 브랜드가 방송을 타면서 미국인들에게 순식간에 알려지게 된 것. 게다가 거래처에서는 납품기한을 연장해 주겠다는 연락까지 왔다.
“전화위복이란 게 따로 없더군요. 그 이후로 직원들이 혼연일체가 돼 1년 여 밤잠을 설친 끝에 미국시장에 안착 할 수 있었습니다.”
강 대표는 미국 입성 이후 혁신적인 제품 개발에 더?박차를 가하면서 해외시장을 하나 둘씩 점령하고 있다. 여기에는 각종 특허 제품들이 선봉을 맡고 있다. 또 시장 다변화를 위해 2002년 중국에 공장을 설립한 데 이어 유럽시장까지 넘보고 있다.
하지만 강 대표는 아직 꿈이 남아 있다. 코메론을 종합수공구 제작업체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미 150여종에 이르는 수공구를 하반기에 선보일 계획이다. 강 대표는 “아무리 하찮은 제품이라도 아이디어만 결합되면 세계적인 상품을 만들 수 있다”며 “이제는 적극적인 사업확장을 통해 사업 기반을 탄탄히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부산=안형영 기자 prometheus@hk.co.kr
■ '세계 최초'를 위해 뛴다
코메론의 제품들에는 항상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유리섬유재 줄자를 비롯해 자석훅 줄자, 셀프락 줄자, 스텐레스 줄자 등이 대표적인 제품들이다.
자석훅 줄자는 끝에 작은 자석을 달아 금속성 물질에 줄자를 고정시킬 수 있도록 고안한 제품이다. 또 셀프락 줄자는 버튼을 누르면 줄자가 감기다가 멈추는 기능을 탑재하고 있다.
각 기능들은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사용자들의 불편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연구 개발자들은 고객의 요구사항을 알기 위해 국제 박람회에 참석하거나, 한 달에 2,3차례씩 조선소, 건설현장 등 줄자를 사용하는 사업장을 찾아 애로점을 수집한다.
하지만 기능만으로 세계 최고가 될 수는 없다는 게 코메론의 생각이다. 이에 따라 ‘기능+브랜드+디자인’이라는 3박자를 갖춘 고부가가치 세계 일류 제품에 승부를 건다. 이를 위해 코메론은 중소기업이지만 디자인경영연구소를 설립해 4명의 전담 요원을 배치하고 있다.
강동헌 대표는 “줄자는 어떤 업체라도 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혁신이 없으면 살아 남을 수 없다”며 “철저하게 기능과 디자인에서 차별화를 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코메론은 편법이 난무하는 줄자 업계에서 정도 경영을 걷고 있다. 300억원 규모의 현금을 보유하면서 무차입 경영을 실현하는 한편, 분기마다 주주들에게 배당을 해 줄 정도로 투자자를 우선정책을 펴고 있다. ‘번 만큼 되돌려 준다’는 생각으로 세금도 꼬박꼬박 내다보니 성실 납세자상도 두 번이나 수상했다.
경영자의 횡령이나 분식회계 등은 코메론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다. 강 대표는 “중국공장이 이름이 정도기공일 정도”라며 “신뢰는 시너지 효과를 내지만 불신은 시장 퇴출만을 낳는다”고 강조했다.
안형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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