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로 연극은 말이 불러일으키는 상상력과 배우의 몸이 재현하는 바에 의지해 생명력을 이어왔다. 지금 공연하고 있는 한 편의 연극 역시 광대한 전장(戰場)을 극장 안에 옮기는 것 못지않게 불가능한 일에 도전했다.
소극장 안으로 들어온 <안나푸르나> . 1999년 히말라야 등정 당시 실종된 여성 산악인 지현옥의 삶에서 출발한 이 연극이 좁은 극장 안에서 고산준령 속 삶의 순간들을 어떻게 표현해냈을까? 안나푸르나>
무대 중앙에 오르막 바위능선을 재현하고, 오른편 자유소극장의 높은 천정을 살려 가파른 빙벽을 들였다. 왼쪽엔 인공 암장훈련벽도 설치했다. 2층과 3층의 테라스 객석을 십분 이용해 높은 지형물과 히말라야 등정 당시 베이스캠프 장면 등을 적절히 담아낸다.
축소된 세트를 통한 재현이야 연극이 자주 쓰는 제유적 방식이지만 극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보다 배우들의 성실한 연기다.
현정(김보영 역), 희서(정유미 역), 선주(윤현길 역), 세 여성 산악인의 우정과 삶의 준열한 지향을 전달하는 배우들의 연기 속에서 내면 연기나 연극적 약속에만 의존하지 않고, 산사람이 되기 위해 체력과 완력을 길러나간 과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암장을 오르는 배우들의 움직임엔 리듬이 있고, 손발은 매끄럽게 움직인다. 등정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생의 매 발자국에서 산(生) 사람이 되고자 했던 그녀들의 치열한 삶을 담아내고 있다.
절제된 대사 또한 이 연극의 미덕이다. 관객 저마다의 <안나푸르나> 를 돌아볼 수 있는 성찰의 행간을 제공한다. 궁극적으로는 자신과의 싸움일 지라도 스타를 배출해 세상의 이목을 끌어 제도를 유지하려는 등반계의 사판(事判) 세계를 놓치지 않은 점은 덤이다. 안나푸르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의 저자 신영복은 산악인의 삶을 소재로 한 소설 <아름다운 동행> 의 추천 글에서 이렇게 썼다. ‘산은… 사회적 실천의 대상으로서 또는 역사적 과제로서, 또는 운명에 대한 도전이라는 깊은 함의로 읽힌다. 아름다운> 감옥으로부터의>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 그리고 자아의 실현에 이르게 된다.’ 산을 오르는 행위가 불러일으키는 인생의 다의적인 비유와 마음 안 무수한 대화를 나누면서 여섯 명 배우들의 조화로운 연기에 푹 젖을 수 있다. 이미례 원작, 김주섭 연출. 30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극작ㆍ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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