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제국'을 건설해 2세기 반 동안 지구촌 경제를 주물러온 유대인 재벌 로스차일드 가문의 기 드 로스차일드가 12일 9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뉴욕타임스는 14일 격동의 20세기에 가문을 이끌었던 그의 생애를 자세하게 소개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번영은 174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거주지 게토에서 태어난 마이어 암셸로부터 시작된다.
무일푼으로 시작해 제후와 귀족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은행가로 대성공한 그는 다섯 명의 아들들이 유럽 각국에 지부를 세워 은행업을 하도록 했고, 나폴레옹 전쟁과 유럽의 철도 붐 등을 거치면서 각국 왕실의 '금고' 역할을 한 이 가문은 세계 역사를 움직이는 실질적 배후로까지 여겨지게 된다.
그러나 1917년 이스라엘 건국까지 이루어낸 로스차일드가의 영화는 2차대전을 맞아 커다란 암초에 부딪친다. 나치의 유럽 정복으로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마이어 암셸의 아들로 로스차일드 가문의 프랑스 지부를 세운 제임스의 증손자인 기 드 로스차일드는 파리 근교의 성에서 살며 귀족들과 화려한 생활을 즐겼던 선조들과 달리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가문을 이끌었다.
2차대전 때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되자 괴뢰 정권인 비시 정부는 유대인인 그의 아버지와 삼촌들의 프랑스 국적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빼앗고 재산을 팔도록 강요했다.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도피했던 그는 샤를 드 골 장군의 자유프랑스군에 합류한 뒤 상선을 타고 유럽으로 돌아오다 도중에 배가 침몰, 12시간을 바다 위에서 떠돌다 극적으로 구출된다.
1944년 파리로 돌아온 그는 가업 재건에 나선다. 특히 1953년 그가 고용한 조르주 퐁피두와는 매우 막역한 사이가 됐는데, 퐁피두가 나중에 총리를 거쳐 대통령이 되면서 로스차일드 가문은 다시 프랑스 정부와 긴밀한 관계가 된다. 그는 로스차일드 은행을 인수합병에 전문적인 투자은행으로 키우고 와인 제조와 경주마 육성에도 손을 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981년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금융사업의 국영화를 진행, 로스차일드 은행을 국영기업으로 바꾸자 그는 "페탱(비시정부 지도자) 치하에선 유대인, 미테랑 치하에선 천민"이라고 한탄하며 미국으로 이주한다.
이후 그의 장자 다비드가 파리에서 다시 은행업을 시작, 현재 로스차일드 런던 은행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며 가문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최진주 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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