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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 야바위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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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 야바위 세상

입력
2007.06.15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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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내가 겪었던 ‘야바위 세상’이야기를 하고 싶다. 전화로 사기를 쳐서 은행통장에서 돈을 빼내가는 국제조직이 있다는 이야기를 신문에서 자주 읽었지만, 내가 직접 그런 전화를 받고 또 주변에서 계속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정말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아침 집에서 전화 벨이 울려서 받았더니 “당신의 신용카드 대금이 삼백몇십만원 밀려 있으니 00은행으로 연락해 주십시오. 00은행 전화번호는 몇번입니다”라고 어떤 여자가 말했다. 신문에서 읽은 대로 억양이 약간 이상한 말투였다.

나는 금방 사기꾼이라는 걸 알아채고 전화를 끊었지만, 혹시 신용카드를 잃어버린 게 아닌지 지갑을 열어 보았다. 카드는 지갑 안에 있었고 그 은행은 내가 거래해 본 적이 없는 은행이었으므로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또 그런 전화가 걸려왔다. 같은 내용, 같은 억양의 말투였다.

● 동창 수첩을 이용한 사기

그 날 점심에 동창모임이 있었는데, 내 경험을 말하기도 전에 사기꾼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밤늦은 시간에 휴대폰으로 이런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는 친구가 몇 있었다.

<나 누구인데 급한 사정이 있으니 300만원만 송금해 줘. 남편과 비자금 문제로 다투다가 이혼을 당할 위기에 빠졌어. 메시지 읽는 대로 즉시 면 내일 오전에 갚을게. 밤에 나한테 전화는 하지 말아. 내 계좌번호는 00은행 몇번이야.>

이런 메시지를 받은 친구들은 황당한 느낌이 들었고, 곧장 사기라는 걸 눈치챘지만, 다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의논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동창수첩을 입수한 사기꾼들이 이 친구 저 친구의 휴대폰에 문자를 보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런 메시지에 속지 말라고 동창들에게 널리 알리고, 동창수첩을 함부로 버리지 않도록 조심시키기로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다른 학교 동창들 중에도 같은 메시지를 받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A여고 B여고 등 몇 학교 동창수첩이 유출된 모양이었다.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경우에는 속을 가능성이 없지만, 아주 친한 친구의 이름이 적혀 있었기 때문에 즉시 300만원을 송금했던 사람도 있다고 한다. 곧 정신을 차리고 지급 중지를 요청했는데, 다행히 돈을 지킨 경우도 있지만, 이미 사기범들이 돈을 찾아간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대학에서 은퇴한 지 얼마 안 되는 전직 교수가 “선생님의 통장에서 돈이 유출되고 있으니 통장 계좌번호를 다 알려달라”는 전화를 받고 통장 번호와 잔액과 주민등록번호 등을 줄줄이 알려 주다가 뒤늦게 정신이 들어서 경찰서로 뛰어갔는데, 똑 같은 일을 당한 동료 교수도 신고하러 와 있었다고 한다. 교수처럼 많이 배운 사람들도 속아 넘어가는 모양이다.

시대마다 유행하는 사기의 유형이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당신의 자녀, 또는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현금이 급하게 필요해서 왔다”고 놀라게 한 후 돈을 받아 도망치는 사기가 흔했다. 휴대전화는커녕 일반전화도 드물던 시대의 이야기다.

최근의 전화사기는 인터넷 뱅킹, 텔레뱅킹 등 금융제도의 변화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노리고 있다. 유식한 사람도 무식한 사람도 그런 전화에 속아서 범인이 지시하는 대로 번호를 누르다가 돈을 잃고 만다.

● 야바위 정치판이 더 큰 문제

며칠동안 연달아서 전화사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사기 속에서 살아간다”는 말이 실감난다. 정말 ‘야바위 세상’이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정치인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정치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야바위꾼이라고 몰아붙일 생각은 없다.

그러나 어지러운 오늘의 정치판, 개인의 이해득실을 따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저마다 옳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야바위판을 연상하는 것은 실례일 것도 없다. 정치인들 스스로 상대를 ‘사기꾼’이라고 비난하고 있지 않은가.

국민을 상대로 야바위판을 벌이는 정치에 비하면 전화사기는 조무라기 잡범에 불과하다. 정치꾼들에게 나라를 들어먹는 사기를 당하지 않도록 국민 모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아무리 혐오감이 북받쳐도 무관심해서는 안 되겠다. 그것이 며칠동안 사기꾼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삼 되새긴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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