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전두환씨 시절 이야기를 해 보자. 그 때 언론은 정부를 비판하지 못했다. 그래서 언론은 외국의 사례나 다른 이들의 입을 빌려 우회적으로 정부를 비판했다. 폴란드 노동자들의 반정부 시위나 필리핀의 민중항쟁은 상세히 다뤘다. 그런 뉴스를 통해 정부 비판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어 했다.
언론인들이 바르게 쓰지 못하는 것을 대신하는 입은 주로 가톨릭의 성직자들이었다. 이때도 군부독재가 일으킨 범죄를 조목조목 들이대는 정의평화위원회 성직자들의 이야기는 제대로 소개하지 못하는 반면-이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된 것은 87년 이후이다-어눌한 말투로 공자님 말씀을 하는 김수환 추기경의 말은 ‘암시적인 비판’으로 환영 받았다.
‘정의가 살아야 한다’느니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느니 하는 원론적인 말들을 당시는 권력에 대한 비판으로 읽으며, 아니 읽히기를 기대하며 앞 다투어 크게 실었다.
또 하나의 입은 대학생들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입이 아니라 몸이었다. 학생들이 군부독재를 비판하는 내용은 소개할 수 없으니까 그들이 분신하고 다치면 그걸 다루는 방식으로 독재를 비판했다. 당시에 그토록 많은 학생들이 분신해야 했던 것은 죽지 않으면 다뤄주지 않던 언론에도 책임이 있다.
■ 암시적으로 하던 정부 비판
과거가 그랬기에 현재 언론은 입 다물고 있으라는 말은 아니다. 한국의 경제와 민주주의가 모두 나선형의 계단을 오르듯 주춤주춤하면서 발전해왔으니 자기비하를 하지도 않겠다. 그 가운데는 더 용감했던 학생과 성직자와 언론이 있었다. 그들의 공을 인정한다.
덕분에 한국사회는 엄청난 언론자유를 구가하고 있다. ‘그놈의 헌법’을 비판한 대통령을 그처럼 불러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데 왜 일부 언론의 보도태도는 독재정권 시절을 답습하는가. 정부의 기자실 축소 및 폐쇄에 대해서 외국의 언론인들 평가를 중시하고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의 언론관을 그토록 크게 비판적으로 다루는가.
차베스가 가난해서 비뚤어졌다는 식으로 쓰는 것은 분명 일부 인사들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가난했던 어린 시절이나 상고 출신이라는 것이 문제행동을 일으킨다고 분석하는 것과 결부되어 읽힌다. 이런 비판은 대통령에 대한 비난이어서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 대한 경멸이 들어 있어서 매우 혐오스럽다.
더구나 매번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 말투를 문제 삼아 소동이 나는 걸 보면 이 무슨 베르사이유 궁정의 귀족들인가 싶다. 하긴 송호근 교수가 임금한테 올리는 ‘차자’를 대통령한테 쓰는 것 자체가 대통령이 국민 다수가 선택한 대표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제왕으로 여긴다는 증거가 아닐까.
■ ‘제왕적 대통령’ 만드는 보수
솔직히 노 대통령을 진보주의자들이 비판한다면 명분이 있다. 현 정부는 거대 여당을 만들어 주었는데도 개혁입법을 조기에 매듭짓지 못했고 그 후에도 신자유주의적인 관점에서 경제를 운용해왔다. 보수파들이 맹공하는 부동산정책은 비상식적인 것을 상식적인 수준으로 만든 정도이다.
기자실 문제만을 놓고 보면 정부 정책은 걱정스럽다. 한국의 현실은 모든 공무원의 재산이 공개되는 덴마크가 아니며 출입처 제도는 공권력에 대한 밀착감시를 가능케 하는 점이 있다.
언론 자체가 1990년대 양적으로 급팽창하면서 기자 하나하나가 전문성을 갖추기 힘든 속사정도 있다. 그나마 출입처 덕분에 정책을 알면서 비판을 할 수 있는 전문성이 갖춰진다. 정부 정책의 문제점을 제대로 지적한 기자들이 출입처 기자인지 아닌지를 검토하면 쉽게 알 수 있다.
게다가 모든 언론을 싸잡아 비난한다거나 ‘선진’취재 지원시스템을 만든다는 어투는 전두환 시절을 떠올린다. 공권력을 견제하고 언론이 제 구실을 하려면 어떤 방식이 좋은지는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다시 논의되길 바란다.
편집위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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