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실에서 잠시 환담을 나누던 이상옥 외무장관과 첸치천(錢其琛)외교부장은 양측 대표단이 마주서 있는 사이로 걸어나왔다. 카메라 플래시가 폭죽 터지듯 회의장 안을 수놓았다.
1992년 8월24일 월요일 오전 9시 베이징의 국빈관 댜오위타이(釣魚臺) 17호루(樓)팡페이위안(芳菲苑)에서 역사적인 한ㆍ중 수교 서명식은 이렇게 시작됐다. 한국과는 1시간 차이가 나니 서울 시간으로는 오전 10시였다.
태극기와 오성홍기로 장식된 서명대 위에는 한국어와 중국어로 된 공동성명서가 놓여 있었다. 두 장관은 각자 자국어로 된 공동성명서에 서명한 뒤 이를 교환해 다시 서명을 했다. 그런 다음 정본을 교환하고 악수를 나누었다. 두 장관은 샴페인으로 축배의 잔을 들었다. 나는 두 장관 사이에서 기념비적인 순간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한ㆍ중수교는 70년대에 대 공산권 개방외교를 전개한 6ㆍ23 선언과 5공 정부가 추진해온 북방외교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후 단절되었던 두 나라의 관계가 정상화되는 데 무려 42년이 걸렸지만 수교 공동서명식은 3분 남짓에 불과했다.
#같은 시각, 서울. 노태우 대통령은 한ㆍ중수교에 즈음한 담화를 발표, “한ㆍ중수교가 남북한 당면 문제의 해결, 더 나아가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과 안정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강조하고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의 초청으로 가까운 시일 안에 중국을 공식방문 할 것이라고 밝혔다.
#같은 시각, 주한대만대사관(중구 명동 2가 83의 7). 정문은 굳게 잠긴 채 쪽문으로 대만여권을 소지한 사람만 드나들게 했다. 이날 오후 4시 한성 화교 고등학생 밴드부가 연주하는 국가가 잔뜩 찌푸린 하늘로 공허하게 흩어지는 가운데 청천백일기의 마지막 하기식이 거행됐다.
김수기(金樹基) 대사는 밤 9시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길에 올랐다. 대만주재 한국대사관도 오전 9시 현판을 철거하고 대사관으로서 기능을 마감했다. 박노영(朴魯榮)대사는 다음날 귀국했다.
“You did a great job!(권 대사, 정말 큰 일 해냈습니다).”
“No, you did it, Excellencies!(아닙니다. 두 분 장관님들이 해내셨습니다.)”
“Yes. we did it ,together! (그래요, 우리가 다 함께 해 냈지요).”
나는 이 말을 평생 잊지 못한다. 서명식이 끝나자 첸 부장이 내 앞으로 다가와 건넨 말이었다. 그 말에 그치지 않고 껴안듯이 내 손을 잡았다. 수많은 사진기자들도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며칠 뒤 나를 초대한 한 지인은 “텔레비전에서 그 장면을 보니 누가 한ㆍ중수교를 실제로 했는지 잘 알겠더라. 첸 부장이 그 것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느낌을 말해주었다.
약 42만㎡의 부지에 18개의 특급호텔급 건물이 들어서 있는 댜오위타이는 손님의 위상에 따라 숙소가 달라진다. 이상옥 장관을 비롯한 우리 대표단은 12호루에서 묶었다. 국가수반급이 묶는 장소다. 수교회담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나를 비롯한 한국대표단은 14호루에 투숙했다.
아침 6시께 나는 막 산책을 나서다가 국빈관 12호루 국기게양대 높이 태극기가 그날 따라 유난히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선명하게 날리는 것을 보았다. 한 세기 가까이 단절되었던 한중 국교가 공식으로 열렸다는 첫 신호를 중국정부는 이렇게 보내고 있었다.
댜오위타이에 밀명을 띠고 첫 발을 들여 놓은 지 석 달 반 만에 성사되는 한ㆍ중수교의 공식 세리모니이자, 중국정부가 취한 첫 번째 공식 행위는 중국의 수도 한 가운데에 태극기를 게양해주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이 미치니 가슴이 뭉클했다. 그리고 마구 고동치기 시작했다. 내 평생에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태극기를 가장 자랑스럽게 사랑했던 순간이었다.
나에게 한ㆍ중수교를 위한 비밀협상의 실무책임을 맡겨준 국가와 이상옥 장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동시에 4대 강국에 둘러싸여 이제는 약소국이 아닌 하나의 분단된 중견국(Middle Power) 외교관의 애환이 엄습함을 느꼈다. 하지만 한ㆍ중수교로 한국은 능동적으로 4강외교를 전개할 토대를 완비한 셈이었다.
권병현 한중미래숲대표(전 주중국 대사) 약력
▦경남 하동ㆍ69세
▦서울대 법대 졸업,미국 피츠버그대 공공행정 및 국제행정대학원 수료
▦고등고시 행정과 수석합격(14회)
▦동북아 2과장(중국과장), 장관 비서관, 주일 참사관, 아주국장
▦주미얀마 대사
▦한ㆍ중수교협상 예비회담 수석대표
▦외교부 정책기획실장
▦주호주 대사, 주중국 대사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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