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6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중국의 해’ 개막식이 열렸다. 2006년 ‘러시아의 해’에 이어 양국의 우호관계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같은 시각 연해주를 포함한 극동러시아에서는 중국상인들의 엑소더스가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4월1일부터 외국인의 옥외점포 판매행위가 금지되면서 중국상인들이 대거 러시아를 떠나고 있었다. 점포가 4,000여 개에 이르던 우수리스크 중국시장도 절반 이상이 문을 닫았다.
대외적으로는 중국경제와의 협력을 과시하면서 한쪽에서는 중국상인들을 몰아내는 모순적인 상황이 지금 신중화의 또 다른 변경 연해주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난 달 30일 봄비가 내리는 우수리스크의 중국시장은 활기가 넘쳤다. 궂은 날씨에도 컨테이너를 개조해 만든 점포들은 문 닫은 곳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성업 중이었다. 3월 말 중국 상인들이 단속을 피해 떠나는 바람에 비었던 2,000여 점포는 두 달 만에 다른 중국상인들로 채워졌다.
1994년부터 이 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조선족 상인 박상진(42)씨는 “연해주는 적은 투자로 많은 돈을 벌 수 있어 중국인에게는 여전히 기회의 땅”이라며 “중국시장 옆 야시장의 경우 단속하기 전보다 오히려 중국상인들이 더 늘었다.”고 말했다. 러시아 정부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잡초와 같은 생명력으로 상권을 지켜가고 있었다.
중국자본에 의해 주도되는 국경지대의 보따리 무역도 날로 번창하고 있다. 우수리스크에서 1백km 떨어진 국경 도시 뽀그라니츠니는 국경을 맞댄 중국의 쑤이뻔허(綏芬河)와 함께 연해주 최대의 국경무역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뽀모가이까의 행렬도 일년 내내 끊이지 않는다. ‘심부름꾼’ 이라는 뜻의 뽀모가이까는 중국 상인에 의해 고용된 보따리상들로 버스나 기차로 국경을 왕래하며 중국상인들이 재래시장에서 판매할 생필품을 대신 나르고 있다.
15년 전 구 소련 붕괴 이후 시작된 이 곳의 보따리 무역은 최근 중국인 큰손들이 등장하면서 점차 조직화되고 규모도 커지고 있다. 현재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뽀모가이까의 숫자는 4만~5만 명 정도로 하루에 많게는 2,000명 이상이 중국을 다녀 온다.
열 살 때부터 부모를 따라 중국을 드나들었다는 효도르(22)씨는 “1,000명이 넘는 뽀모가이까를 확보하고 있는 중국상인들도 있는데 대게 10~15명씩 그룹으로 묶어 관리한다” 라고 말했다.
뽀모가이까들과 함께 45인승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는 길. 쑤이뻔허까지의 거리는 약 15km에 불과하지만 러시아 이민국과 세관, 국경수비대의 까다로운 출국심사 때문에 1시간 40분이나 걸렸다.
쑤이뻔허에 도착한 러시아인들에게 중국공안들은 미소를 띤 채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쑤이뻔허의 거리는 평일 낮임에도 불구하고 쇼핑객들로 북적거렸다. 의류와 식료품 상점이 곧게 뻗은 6차선 도로를 따라 이어졌고 10층 이상의 쇼핑 몰도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중국어와 러시아어가 함께 표기된 간판들은 이 곳의 주 고객이 러시아인임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했다.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아직 시골마을에 불과한 뽀그라니츠니에 비해 쑤이뻔허는 별천지와 다름 없었다.
지난해 쑤이뻔허를 통한 대 러시아 교역량은 비공식 무역을 포함해 총 37억 달러로 중국과 연해주 전체의 공식 교역액 17억 달러의 두 배를 넘었다.
연해주 내에 이 같은 국경무역지대가 세 곳 더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연해주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은 국경을 통한 비공식 무역을 통해서도 엄청난 이익을 챙기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동안 중국의 극동러시아 잠식사태를 방관해 왔던 러시아 연방정부가 중국 상인들을 쫓아내고 지방정부와 중국과의 자유무역지대 추진도 무산시키는 등 초강수를 동원하며 중국을 견제하고 나섰다.
김경률 KOTRA 블라디보스톡 무역관장은 “중국의 값싼 물품과 노동력이 연해주 경제의 활력소인 것은 사실이나 이대로 방치할 경우 지역경제가 중국경제에 복속될 것을 우려한 조치”라고 진단했다.
밀려오는 중국에 대한 위기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얼마 전 이스하코프 극동관구 대통령 전권대표는 1,800만 명의 인구를 극동러시아로 이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구 210만에 불과한 연해주에 비해 국경을 맞댄 동북3성에만 1억3,000만 중국인들이 버티고 있다는 현실은 이러한 주장에 설득력을 보태고 있다.
이미 연해주의 생필품 시장을 장악한 중국은 두만강 프로젝트에 이어 최근 훈춘과 러시아 자루비노항을 철도로 연결하는 등 태평양으로의 진출 의지를 꾸준히 내비치고 있다. 대규모 에너지 개발사업에도 진출했다.
동시베리아와 태평양을 잇는 송유관 건설에도 참여해 연간 3,000만 톤의 석유를 공급받게 되며, 가스운송 협약도 체결했다. 소규모지만 건설업과 부동산, 농업과 목재 가공, 호텔업까지 연해주를 향한 중국업체의 진출 분야도 갈수록 늘고 있다.
연해주를 찾는 중국인 관광객들 사이에서는 “옛날 우리 땅을 보러 간다” 라는 말이 공공연할 정도로 중국은 경제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연해주를 향해 계속 움직이고 있다.
2012년 APEC 정상회의를 블라디보스톡에 유치하는 등 아-태 지역에서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러시아는 중국의 경제적 팽창이 정치적 압박으로 작용하는 상황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전대완 블라디보스톡 총영사는 “중국에 대한 러시아의 견제는 극도의 위기감에 따른 것”이라며 “2012년 APEC정상회담까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한국기업에게는 지금이 바로 연해주에 진출할 절호의 기회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연해주의 주도 블라디보스톡은 ‘동방을 점령하라’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말 그대로 19세기 러시아 동진 정책의 전초기지였던 이 곳이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급팽창하는 중국 경제의 영향권에 서서히 편입되고 있다.
저렴한 물품과 풍부한 인력, 활발한 국경무역 등을 토대로 연해주를 잠식하고 있는 중국경제는 러시아 연방정부의 강도 높은 견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태평양을 향한 동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글 사진 뽀그라니츠니(러시아)ㆍ쑤이뻔허(중국)=박서강기자 pindropper@hk.co.kr
■ 中- 러 보따리 무역은 '뽀모가이까'가 움직인다
뽀그라니츠니의 그로제코보역에서 만난 이반(22)은 한 달에 한 번 쑤이뻔허에 다녀 온다. 중국비자 발급료는 물론 1박 2일 동안 숙식과 교통비 일체를 중국인으로부터 제공받는다.
이 곳 물가는 연해주의 절반 수준이다. 개인적으로 필요한 물건도 사고 술도 한 잔 할 수 있어 좋다. 귀국길에는 35kg짜리 보따리 한 개를 받아 오는데 수고비로 1,000 루블(한화 3만5,000원)을 받는다. 이반은 이른바 ‘뽀모가이까’(심부름꾼)이다.
1991년 구 소련이 붕괴되면서 국경으로 몰려 든 중국인들은 새 옷을 몇 겹씩 껴입고 세관을 통과했다. 이 지역 보따리 무역의 시초인 셈이다.
소비재 보급망이 무너지면서 돈이 있어도 물건을 살 수 없었던 러시아에서 중국산 생필품은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당시 껴입고 간 트레이닝 한 벌 판 돈으로 중국에서는 오토바이를 살 정도였다니 연해주는 ‘기회의 땅’ 그 자체였다.
우수리스크 지역 신문에는 뽀모가이까를 모집하는 광고가 자주 등장한다. 모집에 응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백수’이다. 연령층도 10대 초반부터 50대 후반까지 다양하며 여성이 많다.
중국인 큰 손의 경우 수 천명의 뽀모가이까를 확보하고 있다. 러시아인의 해외 여행이 한 달에 한 번으로 제한 되어 있기 때문에 순환식으로 일을 시키기 위해서이다. 러시아 세관은 얼마 전 러시아 국민 1인 당 면세로 들여올 수 있는 무게를 50kg에서 35kg으로 조정했다.
아침 8시 50분부터 하루 30번 쑤이뻔허를 떠나 뽀그라니츠니로 향하는 45인승 버스와 하루 두 차례 있는 열차는 그야말로 ‘사람 반 보따리 반’이다. 하루 평균 1,500명의 뽀모가이까가 들여오는 보따리의 양은 약 52톤, 일년이면 1만9,000 톤에 달한다. 가격으로 치면 무게 약 1kg, 20달러짜리 청자켓을 기준으로 하루 100만 달러, 1년이면 3억7,000만 달러어치다.
이 지역 외에도 뚜리로크(러)~밀싼(중), 뽈따까~두닌, 크라스키노~훈춘의 국경무역을 포함하면 일 년 동안 중국에서 연해주로 향하는 보따리의 규모는 5억 달러 이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뽀그라니츠니=박서강 기자 pindropp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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