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9년 르누아르는 파리 근처로 그림을 그리러 다녔다. 어느 날 숲에서 나타난 사내가 “그리는 것 좀 구경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작업을 끝내자 사내는 따라오며 말했다. “저는 <로슈포르(공화주의적 출판물)> 에 글을 쓰는 사람인데, 체포를 피해 도망 치는 중입니다. 로슈포르(공화주의적>
화가는 이곳 지리를 잘 알 것 같아서 숨어 지낼 곳을 여쭙고 싶습니다.” “붓으로 뭘 그려본 적이 있습니까?” “옛날에 조금은요.” “내가 당신이라면 물감상자를 들고 이 근처에 방을 얻은 후, 숲에서 스케치를 하며 담배나 피우겠소.” 사내는 얼굴이 밝아지더니 “은혜를 꼭 갚겠다”며 명함을 주었다.
●회화사적 혁명, 인상주의
코뮌 정부가 들어섰다. 그 사내 라울 리고는 막강한 검사가 되었다. 전시라 숲으로 가는 길이 막혔다. 르누아르는 리고 검사를 찾아갔다. 검사는 동료들에게 “내 생명을 구해준 화가”라면서 통행허가증, 공민의 훌륭한 자질 등이 적힌 서류를 마련해 주었다. 르누아르는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이 삽화는 자연에서 작업하기 시작했던 인상주의 화가가 겪은 하나의 우연한 사건이다. 그러나 인상주의의 출발 자체가 본디 정치사회적 사건이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존재를 드러내던 1860~70년대에, 그림을 사려는 애호가가 모이는 유일한 장소는 살롱전이었다. 살롱전은 프랑스 예술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변화와 개혁의 분위기가 꿈틀대고 있었다. 작가 뒤캉은 "사람들은 증기기관차를 발명하고도 바다의 딸인 비너스를 노래한다. 또 전기를 발명하고도 포도송이의 친구인 바쿠스를 노래한다.
이 얼마나 부조리한가?”라고 외쳤다. 변화에 대한 갈망과 아직도 신화에 매달리는 미술 사이의 간극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살롱전에서 줄줄이 낙선했다. 때문에 이들은 시대를 거부하는 개혁가나 혁명가가 되지 않을까 여겨졌다.
정말로 그들의 회화는 형식과 내용 양면에서 혁명이었다. 그 혁명은 거칠지 않고 온건하고 합리적이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칙칙하게 죽어 있는 살롱전의 실내 분위기를 박차고 나와, 찬란한 자연 광선 속으로 들어갔다. 단속적인 붓 터치로, 빛이 빚어준 다양한 색채의 풍경을 재해석함으로써 형식에서 혁명을 이루었다.
또한 소재에서도 신화나 귀족생활 대신, 중산층의 모습과 여가활동을 택함으로써 내용에서도 혁명을 완성했다. 그들은 새로운 사실주의에 바탕하여, 여신 대신 자기가 드나드는 술집의 아가씨들을 그렸다. 그러나 작품이 팔리지 않아 그들의 삶은 항상 위협 받고 있었다.
근래 국내에서도 본격적인 인상주의전이 활발하게 열리고 있다. 인상주의 그림에는 그 앞뒤의 유파에서는 느껴보기 힘든 자연스런 매력과 공감으로 가득하다. 신념과 용기의 사람들인 인상주의 화가들이 이룬 회화적 혁명의 결과다. ‘오르세미술관전’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모아 놓은 전시회이고,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빛의 화가-모네’전은 인상주의의 대표적 화가 클로드 모네를 집중 조명하는 전시회다.
모네는 인상주의 미술의 선각자이며, 순수한 의미에서 인상주의를 완성했고, 백내장으로 시력이 악화한 노년에는 붓 터치도 난폭해짐에 따라 결과적으로 추상미술로의 이행을 촉진한 화가다. 그가 인상주의에 충실하게 그린 많은 연작 중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수련’ 작품들과 센강 풍경화들, 네덜란드 튤립 그림들, ‘일본식 다리’ 등은 행복감과 경건함, 안쓰러움 등 복잡미묘한 감동을 체험하게 하고 있다.
●미술경매보다 전시장이 우선
근래 국내에서도 미술품 경매와 미술시장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일면 고무적인 문화현상이지만, 섣부른 투기는 파국을 부를 수도 있다. 미술품경매장으로 뜀박질하는 것보다는 평소 미술관을 찾아 안목과 감각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교양과 지식은 투기에 우선한다.
논설위원실장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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