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않은 화재는 종종 난감한 상황을 부른다. 이런 상황을 한번 가정해 보자. 어느 날 옆 건물에 세들은 호프집에서 전기합선으로 보이는 불이 나 우리집까지 모두 타 버렸다.
호프집 주인에게 배상을 요구했더니 “고의로 불을 낸 것도 아니고 정확한 화재원인도 알지 못하니 책임질 수 없다”면서 화재보험을 들어놓은 건물주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이때 화재로 인한 손해를 과연 보상 받을 수 있을까.
우리 법은 일반적으로 ‘고의나 과실로 타인에게 손해를 입힌 사람은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화재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에서 ‘과실’은 ‘실화책임에 관한 법률’의 적용을 받아 훨씬 엄격하다.
불을 낸 사람, 즉 실화자는 ‘중과실’이 있을 때만 손해배상책임을 진다.
중과실은 화재의 위험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는데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경우다. 인화성 물질이 많은 공간에서 용접을 하다가 그 불꽃으로 화재가 발생한 때 따위다. 일반적인 ‘경과실’로 인한 책임은 실화자에게 물을 수 없다.
위 사례에서 화재의 원인이 전기합선이라면 이는 중과실이 아니기 때문에 호프집 주인은 손해배상책임을 지지 않는다. 손해배상책임 자체가 없기 때문에 설사 건물주가 화재보험에 들어 있다 하더라도 보험 처리 대상도 아니다. 이유야 어쨌든 옆집에서 난 불로 자기집을 잃은 사람은 억울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는 얘기다.
실화책임에 관한 법률은 헌법소원까지 제기됐지만 합헌 결정이 났다. 단순한 부주의(경과실)로 불을 낸 사람에게 화재의 확대로 비롯되는 지나친 부담을 지울 수는 없다는 취지인 듯하다.
그럼 호프집 주인(임차인)과 건물주(임대인) 사이에는 어떤 책임이 존재할까. 임대차 계약상 호프집 주인은 임차기간 동안 임차물에 대한 원상회복 책임이 있어 건물주에게 손해배상책임을 져야 한다.
이는 중과실, 경과실을 따지는 실화책임에 관한 법률과 관계가 없다. 이 경우 건물주는 가입한 화재보험에서 우선 그 손해를 보상을 받고 보험사가 추후 호프집 주인에게 구상권을 청구한다.
호프집 주인은 전기합선이 원래 임차물의 하자로 인한 것임을 입증해 건물주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화재의 원인과는 별도로 누군가의 중과실 여부를 증명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평소에 화재예방을 철저히 하는 것이 최선책이라 하겠다.
장일환 LIG손해보험 장기손해사정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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