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규제의 보호막은 없다. 약육강식의 경쟁을 뚫고 진정한 국제 경쟁력을 갖춰라.”
이 달 중 국회 통과를 앞두고 있는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일명 자금시장통합법ㆍ자통법)이 우리나라 금융산업에게 요구하는 과제다. 자통법의 핵심은 금융 업종간의 영역 파괴를 통한 경쟁 유도다.
이 법은 증권업, 자산운용업, 선물업에 대한 겸영을 허용함으로써 대형 투자은행이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그런 환경에서 탄생할 투자은행과 기존 은행의 경쟁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의 금융산업은 은행ㆍ투자은행ㆍ보험ㆍ카드사의 4대 업종을 중심으로 재편되며, 그 다음 단계는 이들 업종간의 장벽 제거이다.
결국 자통법이 시행되면 외환위기 이후 과점체제를 형성하면서 각종 규제의 틀속에서 안주하던 은행들이 수백여 개의 다른 업종 금융사들과 경쟁을 해야 한다. 현 상황만 놓고 본다면 그 경쟁의 결과는 몇몇 대형 은행들의 다른 업종에 대한 지배력 강화로 귀결될 확률이 높아 보인다. 하지만 경쟁은 의외의 결과를 숨겨놓고 있으며, 큰 덩치가 승리의 필요충분조건도 아니다.
금융계의 한 인사는 “자통법 시행 이후 빅3로 분류되는 대형 은행들은 1위를 위한 경쟁 외에도 증권사, 보험사, 카드사 등과 복잡한 경쟁을 치러야 할 것”이라며 “그 중에서도 현재 대기업 계열 증권사들이 대형 투자은행으로의 변신에 성공할 경우 대형 은행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권역과 규제가 없어진 무한경쟁을 구도별로 살펴보자.
●은행 VS 은행 외환銀 인수·대우證 민영화가 판도변화 변수
“앞으로 우리나라 은행산업에는 3, 4개의 메이저 은행만 살아 남을 것이다. 현재 몇 장의 티켓이 남아있는가.” 강권석 기업은행장이 최근 직원 조회에서 한 말이다. 강 행장의 말에는 지난 2년여 동안 치열하게 전개된 은행들의 인수ㆍ합병(M&A) 전쟁이 일단락 된 후 자의든 타의든 이른바 빅3의 대열에서 뒤쳐진 후발 은행의 절박함이 절절히 배어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은행들의 M&A 경쟁은 국민은행의 압도적 우위 속에 우리ㆍ신한ㆍ하나지주가 2위 그룹을 이루는 형세가 굳어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국민은행이 외환은행 인수에 집착하다 실패한 사이, 우리ㆍ신한지주가 약진하면서 경쟁구도가 완전히 재편됐다. 그 와중에 하나지주는 외환은행과 LG카드 인수전에서 잇따라 탈락하며 선두그룹에서 한발 뒤쳐지게 됐다.
앞으로 2년 후 혹은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단기적으로는 외환은행이 누구 손에 들어갈 것인가가 판도 변화의 주요 변수가 될 것이다. 또 내년 이후가 될 것으로 보이는 대우증권 민영화 역시 금융권의 판도 변화를 일으킬 태풍의 눈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자통법 통과 이후 각 은행들이 어떻게 짜임새 있는 종합금융그룹으로 변신하느냐가 선두그룹에 서게 될 중요한 변수가 될 전망이다. 이를 위해 후발 그룹인 하나지주와 농협 등이 공공연히 외환은행 인수의사를 천명하고 있고, 기업은행도 보험사나 증권사 인수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은행 VS 증권사 증권사 은행업무까지$은행은 증권사 인수 각축
논란이 됐던 증권사의 지급결제 업무 허용 문제가 증권사의 은행 결제망 직접 참여로 의견이 모아지면서, 자통법의 최고 수혜자는 대기업 계열 증권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들 증권사들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자본 동원력과 투자금융 기법에다 증권계좌를 통한 신용카드 결제, 공과급 납부 등 기본적인 은행 업무까지 할 수 있게 돼 조만간 은행에 맞설 수 있을 만큼 성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금융연구원 연구결과에 따르면 자통법 시행시 은행 보통예금 계좌에서 증권사 종합자산관리계좌(CMA)로 이동할 자금이 향후 2년간 20조원 가량이 될 것으로 추산된다.
여기에 같은 계열의 보험사들과 유기적인 결합까지 이룬다면 굳이 ‘금산분리’라는 까다로운 규제의 벽을 허물지 않아도 은행에 버금가는 위치까지 성장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맞서 아직 증권사를 소유하지 못했거나, 계열 증권사가 취약한 은행들은 증권사나 자산운용사에 대한 M&A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최근 M&A가 결정됐거나 진행 중인 증권사와 자산운용사가 7곳에 달하고, 매각설이 흘러나오는 곳까지 합하면 10개사가 넘는다. 저금리가 지속되고 증시가 활황세를 타면서 예금보다 각종 펀드의 비중이 크게 늘어나는 만큼 은행들의 증권사 인수 필요성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상황이다.
●보험사 VS 은행 방카슈랑스 확대에 보험사‘복합 금융’ 모색
보험사들은 내년 4월부터 방카슈랑스가 확대 시행되면 자동차보험과 보장성 생명보험이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고 있다. 보험개발원은 최근 ‘방카슈랑스가 보험산업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보고서에서 “방카슈랑스 확대 실시로 보험사들의 은행 의존도가 높아져 보험산업의 은행 종속화를 초래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에 따라 보험업계는 방카슈랑스 시행 연기에 총력을 기울인다는 방침이다.
보험사들은 이와 함께 보험, 증권, 은행을 아우르는 금융서비스를 한 곳에서 제공하는 복합 금융점포 설립을 통해 대(對) 은행 반격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지난 2월 대한생명과 한화손해보험, 한화증권 등 한화그룹 금융 계열사들은 서울 중구 태평로 한화손보 본사에 ‘한화금융플라자’를 연 것을 필두로 올해 안에 19개, 내년까지 전국 70여곳에 금융플라자를 설치할 계획이다.
흥국생명과 흥국쌍용화재 등을 거느린 흥국금융그룹도 ‘흥국금융플라자’를 전국 40곳 이상에 개소할 계획이며, 동양생명도 계열사인 동양종금증권과 제휴한 금융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카드사 VS 카드사 은행들 카드사업 강화…전업계와 짙은 ‘전운’
신한지주의 LG카드 인수 성공 이후, 국민ㆍ우리ㆍ하나 등이 카드 사업 강화를 잇따라 선언하면서 은행계 카드사들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여기에 은행계와 전업계 카드의 해묵은 경쟁까지 겹치면서 카드업계는 가장 치열한 경쟁이 이뤄질 전쟁터가 될 전망이다.
통상 은행의 총자산이익률(ROA)은 1.5%만 넘어도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지만 카드는 부실여신 관리만 잘하면 쉽게 10%가 넘는 이익률을 올리는 고수익 사업이다. 자통법 시행 후 전통적인 은행 업무의 위축이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은행들이 이런 영역에 눈을 감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다.
가장 먼저 경쟁의 포문을 연 것은 하나은행. 올초 대중교통 이용시 회당 100원을 할인해준다는 조건을 내세워 2개월 만에 50만명의 신규 회원을 모으는 돌풍을 일으켰다. 금융감독원이 나서 “카드 수익성에 문제가 있으니, 할인 혜택을 축소하라”고 결정할 만큼 파격적인 상품이었다.
우리은행은 ‘카드부문 국내 1위’를 목표로 선언하고 LG카드 사장을 지낸 박해춘 행장을 중심으로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1, 2위를 다투는 신한과 국민은 이미 확보된 고객과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후발주자의 도전을 뿌리칠 태세다.
여기에 체크카드 같은 직불형 카드에 대한 소득 공제율 상향을 놓고 삼성ㆍ현대카드 등 전업계 카드사들이 은행계 카드사에 대한 특혜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어, 전업계와 은행계 카드 사이의 갈등도 고조되고 있다.
우리나라 금융산업이 세계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하기 위해선 자통법 시행이 필요하다는 점에 의문을 갖는 금융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런던이 뉴욕을 제치고 세계 1위의 금융허브로 성장하는데는 2000년에 제정된 영국판 자통법인 ‘금융서비스 시장법’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또 우리의 경쟁 상대인 홍콩, 싱가포르, 호주 등은 이미 2001년을 전후로 자통법을 시행하면서 아시아ㆍ태평양지역 대표 금융허브를 위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경쟁을 통해 강해져라”는 명령은 현재 전 세계 금융산업의 피할 수 없는 숙제다.
정영오 기자 young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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