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책을 들어도 첫장부터 끝까지 읽는 경우가 드물다. 주로 자료로 보는 책들이니 부분 부분만 읽게 되고 소설책 같은 부류는 손에 잡을 엄두가 안 난다. 느긋하게 푹신한 의자에 기대앉아 소설 읽는 재미는 정말 그만이지만 이것저것 작업에 쫓기다 보면 그럴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책을 읽어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옛날처럼 깊은 감동을 얻기가 힘들고 또렷한 인상이 남는 책도 드물다. 그러니 아무래도 한 평생 살면서 젊었을 때, 특히 어렸을 때 읽은 책만큼 큰 감동과 배움을 주는 책은 없는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는 전쟁 직후라서 책이 아주 드물었고 처음 나오기 시작한 학원사의 세계명작 다이제스트 시리즈가 고작이었는데, 그 때 읽은 세계명작은 지금까지도 머리 속에 강하게 박혀있고 나중에는 제대로 완역된 소설로 다시 읽어보기도 했다.
어린 시절 읽은 소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몬테 크리스토 백작> 이다. <암굴왕> 으로 번역된 그 통속 소설을 어찌나 재미있게 읽었는지, 지금까지도 당테스며 당글라르며 메르세데스며 등장인물들을 모조리 외우고 있을 정도이다. 암굴왕> 몬테>
14년간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게 만든 원수들에게 주인공이 차례차례 철저한 복수를 해나가는 과정이 어린 마음에 너무도 완벽하고 재미있었지만, 복수가 끝난 뒤에 주인공이 느낀 허무함은 커다란 교훈을 지금까지 남겨주었다.
남을 미워하지 말자. 나를 나쁘게 보고 나쁘게 대하는 사람도 미워하지 말자. 미워하는 것은 참으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하며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숨이 가빠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지기도 한다. 그래서 누가 뭐라고 하든 내가 편하기 위해 좋은 방향으로 해석한다. 나처럼 게으른 사람은 누굴 미워하기도 어려워서 부지런한 사람이 사람을 미워할 수도 있는 모양이다.
전쟁 뒤의 가난했던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도 별로였던 나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만화(낙서)를 그리든가 세계명작전집을 읽어댔다. 그때에 쌓인 교양(?)이 내 평생을 지배하고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통속소설에 감명 받은 게으른 소년- 그것이 어린 시절 나의 모습이다.
이원복ㆍ덕성여대 산업미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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