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평론가 진중권씨는 압축적 근대화를 겪고 있는 한국인의 사회적 신체 안에는 마치 지층이 쌓이듯이 급격한 사회 변동이 고스란히 충적된다고 말한다. 민주화 이후 학계를 비롯한 문화계 종사자들도 마찬가지일 듯싶다.
이 스무 해 동안 한국 문화계는 표현의 자유 확대, 현실 사회주의 붕괴, 자본의 지배 심화, 정보화 진전 등의 사회적 변화를 겪었고, 문화계 구성원들 역시 이런 다층적 변동을 정신과 신체에 겹겹이 받아들여왔다.
따라서 민주화 20년 동안 개인의 사상 및 작풍의 궤적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사회 전체의 변화와 조응하게 마련이다. 그 상관관계가 높다고 여겨지는 문화계 인사 세 사람을 꼽아봤다.
■ 후일담 문학에서 즐거운 문학으로-소설가 공지영
1990년대 후일담ㆍ페미니즘 문학의 대표주자로 꼽히던 공지영씨는 2000년대 들어 사형수 이야기(<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를 다루거나 일본 작가와 공동 집필(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을 하는 등 문학적 변신을 꾀하고 있다. 사랑> 우리들의>
변함없는 것은 대중적 인기. 94년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종합 10위권에 장편 2권과 소설집 1권을 한꺼번에 올렸던 그는 지난해 같은 서점 차트에 장편 2권을 나란히 10위 안에 올렸다.
공지영 문학의 한결 같은 생명력은 민주화 20년 동안 한국 문학이 겪은 부침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평론가 임영봉씨는 “공씨는 동시대의 관심사와 정서를 정확히 짚어내는 감각을 갖췄다”고 평가한다. 공지영 소설에서 이념 지향적인 후일담 성향은 93년 문민정부 출범을 전후로 이미 걷혔다는 것이 임씨의 분석이다.
과거에서 지금-여기로 눈을 돌린 작가는 무너진 이념의 빈자리를 인간과 삶에 대한 애정으로 채워나갔다.
<인간에 대한 예의> (1994) <고등어> (1994)에서 보여준 인간적 순수성에 대한 믿음은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 동시대인에게 따뜻한 위무가 됐다. 임씨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1993)의 강퍅한 페미니즘도 <착한 여자> (1997) <봉순이 언니> (1998)에 이르러 모성에 대한 넉넉한 긍정으로 변화했다고 말한다. 봉순이> 착한> 무소의> 고등어> 인간에>
평론가 권채린씨는 공씨의 소설이 80년대를 통과한 이들의 부채의식을 달래주었다고 분석한다. 작가는 서울 중산층 출신이란 계급적 정서 때문에 대학(81학번) 시절 학생운동에 완전히 동화하지 못했다고 고백해 왔다.
이런 경험에서 비롯된 ‘금 밖에 있는 자의 정체성’이 민주화운동에 적극 동참하지 못했던 대다수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고 권씨는 지적한다.
공씨는 “학생운동이든 결혼이든 어떤 것에 희망을 뒀다가 좌절한다는 점에서 내 삶은 내가 사는 시대의 운명과 닮아 있다”고 말한다. 이로 인해 소설가로서 자신이 동시대와 같이 호흡할 수 있고 독자에게 감동을 전달할 수 있다고 자평한다.
“80년대에 체득한 무거운 문학관을 벗고 오락적 요소를 추구하려 한다”는 그의 행보가 2000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까. 속단하긴 어렵지만 아직까지는 성공적인 듯 싶다.
■ 끊임없이 탈주하는 마르크스주의-사회철학자 이진경
1987년 당시 24세 사회학도였던 이진경(본명 박태호)씨는 이태 전부터 한국 지식인 사회를 사로잡은 사회구성체 논쟁에 가세했다. 정통 마르크시즘에 기반한 이론서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를 통해 그는 기존 이론을 전방위적으로 비판하며 NL(민족해방)-PD(민중민주) 중심의 새로운 논쟁 구도를 열었다. 사회구성체론과>
최형익 한신대 교수는 “이진경, 윤소영 등의 활약으로 논쟁이 PD 진영 우위로 진행되면서 90년대 사회운동, 특히 노동운동 내부에 PD적 경향이 강화됐다”고 평가한다.
이씨가 90년 ‘노동계급’이란 이적단체를 구성했다는 죄목으로 징역을 살던 2년 동안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했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마르크주의의 역사”에 직면한 그는 이런 역설을 풀어낼 해법을 프랑스 구조주의, 특히 푸코와 들뢰즈로부터 찾았다.
이를 통해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는 마르크스의 기획과 달리 근대성을 극복하지 못한 탓이며, 따라서 근대 자본주의와 국민국가의 정형에서 탈피하려는 끝없는 ‘탈주’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런 탈주를 실천하는 것이 이씨가 주창하는 ‘코뮨주의’다. 그는 “기계나 인공물까지 포함하는 거대한 자연 속에서 상생 관계를 모색하며, 생산관계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을 바꾸는 노력”으로 코뮨주의를 설명한다.
윤건차 일본 가나가와대 교수는 “90년대 한국의 사상적 특징을 포스트모더니즘의 폭발적 유행으로 볼 때 이진경은 80년대 말 이후 한국 사상사의 발자취를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학자 중 하나”로 평가한다.
한편 이씨가 2000년 국문학자 고미숙씨와 함께 만든 ‘연구공간 수유+너머’는 지식 공동체의 새로운 전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곳은 출신 학교, 전공 등의 제약 없이 누구든지 소속될 수 있고, 연구부터 생활까지 자급자족적 운영을 지향한다.
공동체의 최종 목표를 ‘일상의 변화’에 둔다는 점에서 코뮨주의의 현실적 실험이라 할 수 있다.
김원 서강대 연구교수는 “87년을 기점으로 부흥했던 진보적 학문공동체들이 90년대 후반 이후 급격히 제도화, 보수화됐다”며 “수유+너머의 실험이 지식사회의 경직화와 인문학ㆍ사회과학의 위기 극복에 기여할지 주목된다”고 말했다.
■ 독립영화에서 메이저영화 제작자로-이은 MK픽처스 대표
1990년 봄은 독립영화 제작모임 ‘장산곶매’가 만든 장편영화 <파업전야> 로 떠들썩했다. 경찰에서 필름 압수는 물론, 전투경찰까지 투입하며 상영을 막았음에도 민주노조 설립 투쟁을 그린 이 작품은 전국 대학가를 순회하며 30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파업전야>
미학적 완성도에서도 한국 독립영화의 큰 성취로 평가받는 이 영화의 제작자가 현 MK픽처스 대표 이은(46)씨다.
80년대 후반 이후 국내 영화계는 큰 변화를 겪었다. 84년 말 영화 제작업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완화(5차 영화법)되고, 2년 후 외국 직배사의 국내 활동이 허용(6차 영화법)되면서 영화 시장에 경쟁구도가 강화됐다.
80년대 후반부터 장산곶매를 비롯한 비제도권 영화운동의 노력으로 사전심의제도가 위헌 판결(96년)을 받는 등 표현의 자유가 확대됐다.
여기에 비디오기기 공급 확대, 케이블TV 출범과 맞물려 92, 93년부터 대기업의 영화제작 투자가 본격화됐다. 이런 변화에 발맞춰 한국 영화산업엔 충무로를 대체할 신주류가 형성됐고, 여기서 이씨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독립영화 활동을 접고 2년 간 소규모 영화 프로덕션을 운영하던 이씨는 95년 뛰어난 영화 기획자 겸 마케터인 배우자 심재명씨와 함께 영화제작사 ‘명필름’을 창립한다.
명필름은 <접속> (1997)을 시작으로 <조용한 가족> (1998) <해피엔드> (1999)를 잇따라 흥행시키며 한국영화 부흥기에 가장 주목받는 영화사 중 한 곳이 됐다. 영화평론가 안지혜씨는 “이은 대표는 독립영화에서 상업영화로 진출하며 최근 한국영화 20년사의 중요한 변화를 선도해온 대표적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해피엔드> 조용한> 접속>
이씨는 “장산곶매 시절부터 지금까지 리얼리즘이 한국영화의 전통이란 생각은 변함없다”고 말한다. 명필름의 필모그래피에서 <공동경비구역 jsa> (2000) <그때 그사람들> (2005)과 같은 ‘문제작’이 적지 않은 것은 그가 386세대 영화운동가 출신이란 점과 무관치 않다. 그때> 공동경비구역>
경영자로서 이씨는 한국영화 시장의 ‘10년 암흑’을 예상한다. “지난 10년 간 급속히 포화된 국내 시장을 대신할 해외 시장 개척이 미진하다. 제작비 증가, 스크린쿼터 축소, 일본 의존적 수출 구도 등까지 겹쳐 당분간 한국영화는 도약의 고통을 겪을 것 같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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