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여름 뙤약볕 아래, 맨주먹 불끈 쥐고, 붉은 머리띠 질끈 동여매고, ‘독재 타도’ ‘민주 쟁취’를 외쳤던 열혈 청년들. 이제 마흔을 넘겨 중년에 접어든 그들은, 지난 20년간 어디서 어떻게 살아왔을까.
6월 항쟁의 주역이었던 조동기(조동기 국어논술학원 원장ㆍ고려대 국어교육과 85), 이상일(바른손 사원ㆍ한국외대 불어과 82), 장유경(농민ㆍ이화여대 국문과 85), 김종삼(부산 학이시습한의원 원장ㆍ부산대 조선공학과 84), 양동철(부동산 중개업ㆍ충남대 국문과 84)씨 등 5명을 만나, 87년 이후 우리 사회와 자신의 변화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20년 전 민주화 투쟁의 중심에 섰던 기억이 생생할 듯 한데.
△ 장유경= 중 2때 광주에서 5ㆍ18을 겪었다. 아버지가 현장을 데리고 다니며 역사를 보아야 한다고 하셨다.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대학 입학한 뒤 망설임 없이 운동에 나섰다.
△ 김종삼= 87년 당시 부산대 총학생회장이자 전대협 1기 영남 부의장이었다. 부산의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연행돼 조사를 받던 중 6ㆍ29선언을 맞았다.
△ 조동기= 당시 총학생회 문화부 차장이었는데, ‘우리 모두 잡혀가서 구치소, 유치장을 다 채우자’던 총학생회장 인영 형(이인영 열린우리당 의원)의 말이 귀에 쟁쟁하다. 그래서 비폭력 연와(連臥)시위를 했다. 4ㆍ19 혁명 때 그랬던 것처럼, 6월 항쟁 때도 고려대생들이 투쟁의 선봉에 섰다고 자부한다.
△양동철= 충남대 문과대 학생회장을 맡아 대전지역 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혈기로만 보면 계속 운동을 했을 것 같은데, 그 뒤 어떤 길을 걸었나.
△ 김= 대기업 취업은 굴욕적인 일이라는 게 당시 정서였다. 다들 노동자로 취업했는데, 나는 너무 얼굴이 알려져 힘들었다. 95년 동의대 한의대에 입학했다. 개업 6년째다.
△ 양= 졸업 후 대전충남 민청련에서 활동하다가 두 차례 감옥 갔다 온 뒤 생업을 위해 상경해 보험설계사가 됐다. 영업소장까지 했는데 IMF 위기 이후 어려움을 겪다가 2002년 대전으로 내려와 부동산 중개업을 시작했다.
△ 조= 89년 졸업 후 서울영상집단 ‘노동자뉴스 제작단’에서 활동하다 갈등을 빚고 그만뒀다. 대학까지 나오고도 시장에서 야채 장사 하는 어머니에게 손 벌리는 짓은 ‘운동을 빙자한 폭력’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르바이트로 학원 강사를 시작했다가 본업이 됐다.
△ 장= 졸업 후 재야단체 등에서 활동했으나, 내적 갈등으로 많이 방황했다. 문화공동체 활동을 거쳐 지금은 남편과 함께 농민들 틈에 들어가 농사 짓는다.
△ 이= 위장 취업했다가 붙잡혀 입대하는 바람에 6월 항쟁은 병영에서 맞았다. 89년 제대한 뒤 가정 형편으로 생업을 찾았다. 현재 직장에서 해외업무를 맡고 있다.
지난 20년간 우리 사회의 변화를 어떻게 평가하나.
△ 조= 그 시절 왜 돌을 던졌을까 생각해보면 대단한 철학이 있었다기보다 권위주의로부터의 탈출, 그 극단인 독재의 청산을 바랐던 거다. 그걸 이루지 않았나. 삶의 질도 높아졌다. 노무현 정부가 한 게 없다고 하지만, 권위주의 청산만도 의미 있는 성과다.
△ 양= 경제적 민주화를 이루지 못한 것이 아쉽다. 3대에 걸친 민주정부가 무능했다는 평가에도 일정 정도 공감한다. 과거 민주세력이 조직적인 비전과 대안을 제시하기보다 개별적인 정권 참여에 그쳤던 것이 문제였다.
△ 장= 참여정부에 더 자주적인 태도를 기대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농민들 앞에 먹구름이 닥치고 있다. 학생 때부터 좋은 세상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했는데, 지금 이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 김= 민주세력에 대한 폄하를 이해할 수 없다. 6월 항쟁으로 처음 민중항쟁이 성공했다. 역사는 진보하고 있다고 본다.
스스로의 변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소시민적 생활인으로 안주해 버린 건 아닌가.
△ 양= 자본가를 타도 대상으로 여기던 생각 등은 달라졌지만, 정치의식까지 보수화한 것은 아니다. 꾸준히 여러 단체에 참여하며, 생활인으로서도 건강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 김= 한의사를 결코 소시민적인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방 대중화를 위해 젊을 때 못지않은 열정으로 활동한다.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일이라면 지금도 언제든지 몸을 던진다.
△ 장= 나는 유기농 농사를 통해 땅을 살리고 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것이다. 20년 전에 하던 일과 똑같다고 본다.
△ 이= 소시민적이라는 말에 공감하지만, 원리원칙을 지키며 살려고 한다.
△ 조= 운동하던 놈이 민중이 아닌 돈 있는 애들 가르쳐 출세욕을 채워준다는 비판도 있는 것 안다. 하지만 떳떳하게 살았다. 공교육이 내팽개친 아이들에게 효율적인 공부 방법 일러주고, 논술을 통해 세상 보는 눈도 길러주며 인재 만들기에 기여한다고 자부한다.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가치가 실종된 데 대해 우려가 많다.
△ 양= 특히 젊은 세대의 사회참여가 적어진 것이 안타깝다. 하지만 IMF 위기 이후 생존경쟁에 내몰린 그들만의 책임이 아니다. 공동체의식은 가지라고 역설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지 않나. 경제구조, 노동구조를 개혁해 그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 조= 문제는 결국 신자유주의다. 이를 극복할 대안을 찾지 못하면, 그 어떤 논의도 공허하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진보 진영의 대안적 정책 생산을 목표로 한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등 곳곳에서 진지한 모색이 시작됐다는 데서 희망을 갖는다.
유승우기자 swyoo@hk.co.kr이희정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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