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서울 남영동)
1987년 1월 14일 당시 22살이던 서울대생 박종철 씨가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했던 장소. 6월 항쟁을 촉발시켰던 사건이다. 이웃에 살던 사람들도 도대체 ‘뭐 하는 건물’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밀폐된 조사실은 군사독재 시절 탄압을 상징한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 등 수많은 인사들이 이곳에 상주하던 고문기술자 이근안 등에게 고통을 당했다. 2005년 7월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개조됐으며, 박 열사가 숨졌던 509호 조사실은 대리석 욕조 등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는 6월 항쟁과 민주화과정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학생들의 견학장소로 애용되고 있다.
◆기독교회관 (서울 종로5가)
1987년 5월27일 서울 향린교회에서 15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결성식을 가졌던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기독교회관에 둥지를 틀었다. 2,193명의 각계인사가 발기인으로 참여한 국본은 기독교 회관에서 선언문 낭독, 국민대회 개최 발표, 행동지침 전달 등 6월항쟁의 총사령부 역할을 수행했다. 6월16일 압수수색을 당하기도 했다.
현재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등과 연대한 인권행사나, 각 진보단체들의 기자회견 장소 등으로 애용되고 있다. KNCC 황필규 목사는 “6월항쟁 때는 각 종교기관들이 쫓기는 민중들의‘소도(蘇塗)’역할을 했었다”며 “지금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을 통해 기독교의 보수적 목소리만 부각되고 있는 것이 우려스럽다” 고 말했다.
◆명동성당 (서울 명동2가)
6월 10일 성공회 대성장에서 예정됐던 ‘고문살해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원천봉쇄 되자, 각 대학별로 1만여명이 출정식을 갖고 이중 수천명이 명동성당에 집결해 철야농성을 시작했다. 12일에는 소위 ‘넥타이부대’로 통하는 회사원 1,000여명이 거리에 구호를 외치며 나와 명동성당 시위에 동참했다. 농성은 시국미사가 예정된 15일까지 계속됐다.
6월항쟁 이후에도 명동성당은 오랫동안 학생, 파업 노동자들의 은신처였다. 1995년 6월 농성중이던 한국통신 노조간부들을 연행하기 위해 명동성당에서 최초로 공권력이 투입되자, 사제들은 공권력 투입에 항의해 침묵시위를 하고 70,80년대와 6월 항쟁 때처럼 시국미사를 열었다. 그러나 명동성당은 2000년대 들어 농성 중인 노조원들에게 철수를 요청하는 등 은신처의 역할에서 멀어져 갔다.
◆서울시청 앞 광장 (서울 중구 을지로1가)
1987년 7월 9일 고향 광주로 떠나는 연세대생 이한열씨의 장례식이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열렸다. 이한열씨는 6월9일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다 7월 5일 사망했다. 박종철씨 사망이 6월항쟁의 촉매제가 됐다면, 이씨 사건은 6월 항쟁을 정점에 이르게 했다. 6월 한달간 서울역앞, 동대문로터리, 영등포 로터리 등 곳곳에서 진행돼온 가두시위는 시청 앞 광장 집결로 최고조에 달했다. 100만 인파였다.
당시 시청앞 광장 주변 건물의 옥상은 기자들이 올라가지 못하도록 통제됐다. 전체 인파를 담은 사진을 찍을 수 없게 하기 위해서였는데, 외신기자 한명과 한국일보 당시 고명진 기자만이 옥상에 올라가 장례식 장면을 담는데 성공했다. 지금의 시청 앞 광장은, 여중생 미군 장갑차 사망사건의 촛불시위와 월드컵 거리응원의 붉은 인파로 기억된다. 간헐적으로 집회가 열리지만, 보름달 모양 푸른 잔디로 개조된 후부터는 오락ㆍ문화행사의 단골 장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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