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ㆍ상ㆍ제ㆍ한ㆍ서’. 외환위기 전 재계에 5대 재벌(현대 삼성 대우 LG SK)이 있었다면, 금융계에는 5대 시중은행이 있었다. 서열을 중시하던 사람들은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은행의 앞 글자를 따서 그렇게 불렀다. 후발 주자였던 신한이나 하나, 한미은행은 넘볼 수 없는 전통적인 서열이었다.
지난해 3월31일 오후. 서울 을지로 조흥은행 본점에 걸려 있던 ‘CHB 조흥은행’ 간판이 내려졌다. 109년 전통의 국내 최고(最古)은행이자 부동의 서열 1위 은행이 후발 주자인 신한은행에 인수ㆍ합병돼 역사 속으로 사라진 순간이었다. 더불어 ‘조ㆍ상ㆍ제ㆍ한ㆍ서’ 시대가 막을 내림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은행은 망하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이 무너진 것은 외환위기 발발 직후인 1998년 4월.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대책조정회의는 부실 금융기관을 과감히 시장에서 퇴출시켜 우량은행에 합병하는 내용의 ‘금융ㆍ기업 구조개혁 촉진 방안’을 마련했다. 2개월여 뒤, 당시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이 대동, 동남, 동화, 경기, 충청 등 5개 은행의 퇴출을 전격 발표했다. 이들을 인수할 은행으로 국민, 주택, 신한, 한미, 하나은행이 반강제적으로 낙점됐다.
이를 시작으로 그 해 은행간 짝짓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상업ㆍ한일(7월) 하나ㆍ보람(9월) 국민ㆍ장기신용(9월) 조흥ㆍ강원(12월) 등이 차례로 합병했고, 이듬해 2월엔 조흥은행이 충북은행을 다시 합병했다.
좀처럼 무너질 것 같지 않던 ‘5대 은행’도 하나 둘 자취를 감췄다. 상업ㆍ한일 합병은행은 공적자금 투입과 함께 한빛은행, 우리은행으로 차례로 이름을 바꾸며 완전히 새로운 은행으로 탈바꿈했고, 제일은행은 뉴브리지캐피탈과 스탠다드차타드에 연이어 경영권이 넘어 가면서 SC제일은행이라는 상호의 외국계은행이 됐다. 2002년 말 서울은행 역시 후발 주자인 하나은행에 흡수됐고, 마지막 남은 조흥은행마저 지난해 신한은행에 주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금융 빅뱅의 회오리 속에 사라진 ‘5대 은행’의 자리를 대신 꿰찬 것은 국민, 우리, 신한 등 ‘빅3’다. 국민은행은 국민과 주택은행의 합병으로 총자산 214조원의 국내 최대 은행으로 거듭났고, 우리 신한은 금융지주회사로의 변신을 통해 대형화ㆍ겸업화 추세를 주도하며 은행권 주류로 자리잡았다. 하나은행은 ‘빅3’에 다소 뒤쳐졌고, 나머지 3개 시중은행(외환 한국씨티 SC제일)은 모두 중소형 외국계은행으로 남았다.
하지만 금융 빅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외환은행 재매각, 우리금융지주 정부 지분 매각,국책은행인 기업은행의 민영화 등 시장의 판도를 바꾸놓을 만한 사안들이 남아 있다. 더구나 좁은 국내 시장을 둘러싼 출혈 경쟁에서 벗어나 해외 시장 개척 요구도 빗발친다. 다시 10년 뒤, ‘빅3’ 중 살아남는 은행이 과연 어느 곳일지, 중소형 은행 중 화려하게 도약할 곳이 어디일지 주목된다.
이영태 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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