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은 엊그제 6월항쟁 주역이었던 4054세대(항쟁 당시 20대~30대 전반기였던 세대)가 항쟁 이후 들어선 정부들 가운데 노무현 정부를 가장 낮게 평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내일신문>
여론조사기관 '디오피니언'의 조사 결과에 바탕을 둔 이 기사에 따르면, 수도권의 40~54세 유권자들은 김대중 정부(1백점 만점에 55.1점), 김영삼 정부(46.4), 노태우 정부(43.1), 노무현 정부(41.8) 차례로 순위를 매겼다.
여론조사라는 것은 설문 형식이나 접촉 형태 등 기술적 조정에 따라 사뭇 다른 결과를 내놓을 수 있으니 여기 큰 의미를 둘 것은 없겠다. 다만, 1980년대 민족민주운동의 흐름에 자리잡은 6월항쟁 정신의 핵심이 민주주의와 민족화해라면, 두 '김씨 정부'가 비교적 후한 점수를 받은 것은 그럴 듯하다.
김영삼 정부는 정치군부 숙청을 통해 문민정치의 주춧돌을 놓았다. 김대중 정부는 북한과의 화해와 협력을 본격화하고 알량하나마 빈곤층의 사회안전망을 구축함으로써 평화와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이바지했다.
● 두 '盧대통령'을 위한 변명
그러나 상대적으로 박한 점수를 받은 두 '노씨 정부' 역시 '87년 체제'의 진화에 긍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사실이 잊혀서는 안 된다. 항쟁 직후 두 김씨의 분열로 노태우씨가 집권했을 때, 항쟁 주체들은 크게 낙망했다. 그 낙망이 지나친 것이었음이 지금은 또렷하다.
군사반란과 부패로 얼룩진 노태우씨의 개인이력과 상관없이, 그가 이끈 정부는 민주화의 흐름을 크게 거스르지 않았다. 오래도록 입에 재갈이 물려있던 한국사회는 말의 자유를 얻었고, 노동운동과 통일운동 역시 저강도 탄압 속에서 큰 운동량을 얻었다.
물론 수사기관의 고문은 그 강도와 빈도를 줄인 채 계속됐고, '군사문화'를 비판한 현직 기자가 백주에 현역 군인에게 칼 테러를 당하기도 했으며, 단속적으로 공안정국이 조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인적 연속성에도 불구하고 제6공화국 1기는 제5공화국이나 그 이전 유신체제(제4공화국)와는 질적으로 다른 체제였다.
강준만이 '권력변환'이라 부른 과정을 통해 파시즘은 한결 부드러워졌고, 그에 따라 시민적 자유의 공간은 눈에 띄게 넓어졌다. 비록 민간부문 통일운동에 대한 맞불의 성격이 있긴 했으나, 7.7선언(1988)과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남북협력기금법, 남북기본합의서 등을 통해 남북협력의 큰 틀이 마련된 것도 노태우 정부 때였다.
오늘 노무현 정부를 두둔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적어도 지금의 논평가들보다 뒷날의 논평가들이 이 정부에 후한 점수를 주리라는 정권 쪽 주장은 옳을 가능성이 크다. 노무현 정부는 한국 정치사상 처음 들어선, 진정 반-권위주의적인 정부다. 그것의 부작용이 그것의 의의를 지우지는 못한다. 게다가 이 정부는, 단언하긴 이르지만, 대통령이나 그 주변인물이 커다란 부패추문에 휘말리지 않은 유일한 정부다.
갈등을 조정해야 할 국가수반이 한 정파의 우두머리가 돼 갈등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직업적 전선(戰線) 형성자 노릇을 하고 있다는 언론의 비판은 옳지만, 민주화 이후 기꺼이 한 정파의 일원이 돼 갈등생산과 전선형성을 선도해온 것이 바로 언론 자신이었다는 사실도 함께 지적돼야 한다.
● 6월항쟁은 승리했다
민주화 20년을 되돌아보는 일이 편치만은 않다. 김영삼 정부는 섣부른 세계화 시동으로 외환위기를 불러일으켰고, 김대중 정부는 그 위기를 서둘러 벗어나는 과정에서 사회양극화의 방아쇠를 당겼으며, 노무현 정부는 아예 시장의 문을 활짝 엶으로써 약육강식을 한국사회의 지배원리로 선언했다.
본지의 '강준만 칼럼'이 자주 일깨우듯, 문화민주주의도 갈 길이 아득하다. 그러나 6월항쟁은 승리했다. 이리 말하는 것은 그 해 6월29일의 '노태우 선언' 때문만이 아니다. 오늘날 6월항쟁 이전 집권세력의 후신들도 한국사회를 항쟁 이전으로 되돌리자고 선동하지는 않는다. 6월항쟁이 승리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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