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그레브행 비행기를 탄 것은 베오그라드행 비행기가 없어서였다. 1993년 3월, ‘유럽의 기자들’ 프로그램에서 내게 맡겨진 일은 전시(戰時) 유고슬라비아의 작가 상황을 취재해 기사 세 꼭지를 쓰는 것이었다. 나는 유고슬라비아 역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지역이었던 세르비아 쪽에 특히 관심이 갔다. (그 때 이미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를 뺀 다른 지역들은 제가끔 독립을 선언했던 터라, 유고슬라비아 지역 전체를 아울러 부를 땐 ‘옛 유고슬라비아’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었다.)
당연히, 첫걸음을 베오그라드로 내딛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당시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책임을 주로 베오그라드의 밀로셰비치 정권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계 민병대 쪽에 돌리고 있던 국제 여론 탓에, 베오그라드로 가는 항공로는 막혀 있었다. 그 시절 베오그라드는 하늘길이 완전히 봉쇄된,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수도였을 것이다.
파리에서 베오그라드로 가는 가장 쉬운 방법은 부다페스트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 거기서 열차로 갈아타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전의 한 당사자인 크로아티아 쪽 분위기를 어차피 살피기는 살펴야겠다는 생각에서 나는 파리_자그레브 티켓과 류블랴나_파리 티켓을 끊었다. (류블랴나는 그보다 두 해전 크로아티아와 함께 유고슬라비아연방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한 슬로베니아의 수도다.
최근 10여 년 사이 한국 지식인사회 일각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문화이론가 슬라보이 지젝이 태어나 자란 곳이 바로 류블랴나다.) 자그레브에서 시작해 발칸과 중부유럽을 둘러본 뒤 류블랴나에서 파리행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기로 계획을 세운 것이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해체는 쪼개져나간 나라 수만큼의 수도를 만들어냈다. 자그레브나 류블랴나도, 비록 그 전부터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이루는 공화국들의 수도이긴 했지만, 연방 해체 이후 독립국의 수도가 되었다.
자그레브에 첫발을 내딛기 전, 내가 그 도시에 대해 지녔던 정보는 그보다 여섯 해 전인 1987년에 하계 유니버시아드가 열린 도시라는 정도였다. 냉전시대의 한국은 공산권에서 열리는 국제스포츠대회에 거의 참가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그레브 유니버시아드에 우리 선수들이 갔으니 기억에 깊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한참 전인 1973년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정현숙, 이에리사 등의 선수들이 여자단체전 정상에 올랐던 것도 기억난다. 사라예보는 저 유명한 사라예보사건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방아쇠를 당긴 도시지만, 한국 사람인 나에겐 그저 몇몇 여자 탁구 선수들 이름과 관련돼 있다. 자그레브도 사라예보도 다 옛 유고슬라비아의 도시들이다.
비록 사회주의국가라고는 하나 유고슬라비아는 코민포름과 바르샤바조약기구 바깥에 있었고, 또 노동자 자주관리제라는 것을 통해 주류 공산체제와는 다소 거리를 둔 나라였다.
자그레브든 사라예보든, 그것들은 오래도록 내게 유고슬라비아 도시들이었지 크로아티아의 수도라거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가 아니었다. 실상 내 학창 시절 내내 크로아티아나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가 그랬듯, 그저 세계사 교과서에 갇혀있는 지명이었을 뿐 세상에 실재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그런데 1990년대 초 어느 날, 이 이름들이 세계사 교과서에서 현실세계로 튀어나와 버젓한 나라가 되었다. 옛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연방의 수많은 공화국들처럼 말이다.
내 자그레브 행에는 동행이 있었다. 모니카 A. C.라는 에콰도르 여자였다. 모니카는 에콰도르의 무역항 과야킬에서 나오는 일간지 <오이> (Hoyㆍ‘오늘’이라는 뜻)의 기자였는데, 나와 함께 ‘유럽의 기자들’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었다. 모니카에게는 옛 유고슬라비아 지역의 언론 상황을 취재하는 일이 맡겨졌던 터라, 그녀와 내 동선은 거의 겹칠 수밖에 없었다. 오이>
공항에 도착한 때가 이미 밤이었는데, 시내로 들어가 호텔 프런트 몇 군데를 전전했으나 도대체 빈방이 없었다. 네 번째로 들른 야드라 호텔에서 우리의 방황이 끝났다. 프런트의 남자는 방이 딱 하나 남아있다고 말했다. “물론 2인실이죠?” 모니카가 그 남자에게 물었다. “네.” 남자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용속! 하느님이 우릴 도우셨네!” 모니카가 내 볼에 입을 맞췄다.
‘용속’은 ‘종석’이라는 발음이 너무 힘들었던 내 ‘유럽의 기자들’ 동료들이 나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나는 속으로 당황했지만, 티내지 않으려 애썼다. (아니, 한 방을 쓰잔 말이야?) 방에 들어가 보니 더 가관이었다. 하나 남아있다던 그 방이 트윈룸이 아니라 더블룸이었던 것이다. 2인용 침대가 딱 하나 있는 방.
모니카와 나는 한 이불을 덮고 세 밤을 잤다. 침대 위에서 우리는 껴안지도 않았고 뽀뽀도 하지 않았다. 그냥 잠만 잤다. (믿고 싶지 않은 독자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정말이다.) 나는 서른 네 살의 기혼 남자였고, 모니카는 스물 아홉 살의 미혼 여자였다. 우리가 무슨 윤리적 판단 때문에 몸가짐을 절제한 것은 아닌 듯하다. 내가 모니카에게 성적으로 끌리지 않았고 모니카도 내게 성적으로 끌리지 않아 일이 그리 됐을 게다.
게다가, 함께 잠잘 때를 빼고 나는 줄곧 모니카를 피해 다녔다. 여자라는 게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양 모니카는 공항에 내려서부터 제 짐 대부분을 나한테 들렸고, 그 뒤에도 이런저런 잔일을 부탁하며 나를 완전히 제 종 취급이었다. 그녀의 팔이 내 팔보다 더 굵직했던 것은 접어두더라도, 어느 모로 보나 이 에콰도르 여자가 나보다 더 튼튼하고 팔팔했는데 말이다. 모니카는 제가 취재원을 만나는 자리에까지 내가 함께 있어주기를 바랐다.
도착한 다음날 저녁, 호텔 근처 공화국 광장의 분수대 앞에서 마침내 내가 그녀에게 쌀쌀맞게 선언했다. “모니카, 난 널 좋아하지만 네 비서는 아냐!” 이 문장의 뒷부분은 사실이었지만, 앞부분은 사실이 아니었다. 내겐 가까운 에콰도르 친구들이 몇 있었는데, ‘허영덩어리 모니카’(미안하다, 친구여!)에겐 처음부터 마음이 뜨악했다.
그 뒤 모니카의 공주병은 사라졌으나, 공주병과 함께 그녀의 말도 거의 없어졌다. 첫날밤(이란 말의 뉘앙스가 묘하긴 하나)에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하다 잤지만, 둘째 날 셋째 날엔 서로 등을 돌리고 침묵 속에서 잠을 청했다.
나흘째 되는 날 육로로 베오그라드를 향해 출발하며, 나는 이 친구를 베오그라드에서 제발 안 보게 해주십사고 그녀의 하느님께 기도했다. 모니카도 하루 뒤 베오그라드로 올 예정이었다.
자그레브는 도나우강(다뉴브강) 지류인 사바강과 메드베드니카산 사이에 들어선 도시다. 서울로 치자면 사바강이 한강에 해당하고 메드베드니카산이 북악산에 해당한다. 최근 몇 십 년 사이에 사바강 남쪽에 노비자그레브(새 자그레브) 구역이 개발된 것도 서울과 닮았다.
내가 다녀본 유럽의 수도들에서 산을 본 것은 자그레브가 처음이었다. 구시가 일부의 중세적 분위기는 서울과 딴판이었지만, 나는 그 산 때문에 자그레브에서 문득문득 서울 생각을 했다. 어린 시절 서울에서 타고 다니던 전차만큼이나 느릿한 전차를 이 도시에서 다시 타보게 돼 그랬는지도 모른다.
자그레브는 중부 유럽과 아드리아해를 잇는 교통의 요지다. 그러나 내가 자그레브에 갔을 무렵엔, 이 도시에서 동남쪽 방향의 옛 유고슬라비아 영토로는 국제 열차가 다니지 못하고 있었다. 발칸은 전쟁 중이었기 때문이다.
1991년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발칸반도에서 터진 전쟁은 그 초기에 흔히 유고슬라비아 내전이라 불렸지만, 그것은 여러 겹의 분쟁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었다.
독립선언 직후 크로아티아 주둔 유고연방군(JNAㆍ유고인민군)의 개입으로 베오그라드 정부와 자그레브 정부 사이에 시작돼 네 해 너머 이어진 전쟁은 글자 그대로 유고슬라비아 내전이라 할 만했지만, 크로아티아 입장에서 그것은 독립전쟁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보스니아_헤르체고비나에서 무슬림과 세르비아세력 사이에 터진 전쟁은 보스니아 내전이라 부르는 것이 상례다.
한참 뒤 코소보에서 세르비아정부군과 알바니아계 무슬림 사이에 벌어진 분쟁도 크게 보면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한 가닥이겠으나, 그것은 보통 코소보 사태라 부른다.
전시(戰時)의 수도는 놀랄 만큼 평온했다. 전선이 100㎞ 이상 떨어져 있어서 피비린내가 자그레브까지는 닿지 않았지만, 불과 한 해 반 전 이 도시는 베오그라드 정부를 지지하는 유고인민군과 크로아티아군 사이에 산발적인 시가지 전투가 벌어지던 곳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 표정에서 긴장감이 읽히지 않았다. 내가 며칠 뒤 확인하게 될 베오그라드 풍경과는 딴판이었다. 자그레브 시민들은 그 때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서방 열강이 이끄는 세계 여론이 제 편이라는 것을 말이다.
시내 한 중심 고르니그라드(‘높은 도시’라는 뜻이라 한다) 구역은 몇 집 건너가 카페였다. 목을 축이러 들어간 카페에서 우연히 어울리게 된 대학생 하나는 전쟁의 참상보다 독립의 기쁨을 더 얘기하고 싶어했다.
그는 자신이 ‘유고슬라비아인’이 아니라 ‘크로아티아인’임을 힘주어 말했다. 새벽까지 여는 카페는 매우 드물었으나, 전시의 자그레브에 통행금지 시간은 없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한국전쟁이 아니었다!
고르니그라드 구역을 내려다보는 성(聖) 마가성당에 들어가, 나는 이른 종전을 진심으로 기원했다. 비신자인 나의 그 기도는 위선이면서 예의였다. 따지고 보면 이 성당은 평화의 거소라기보다 분란의 거소였다.
유고슬라비아연방으로부터 독립을 가장 먼저 선언한 것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인데, 그런 원심력의 에너지원(源) 하나가 바로 가톨릭교회였던 것이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역사적으로 오스트리아_헝가리제국의 일부였고, 그래서 가톨릭 사회였다. 정교(正敎)의 세르비아가 동방 러시아문화권에 속했다면, 크로아티아는 서방 독일문화권에 속했던 것이다.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독일이 이를 곧바로 승인한 것도 이런 역사를 배경에 깔고 있다. 남슬라브족(유고슬라브)이라는 피의 연대가 문화와 역사의 연대(라기보다는 ‘기득권’이라 해야 할지 모른다.
유고슬라비아의 정치적 중심은 세르비아였지만 경제적 중심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쪽의 가톨릭권이었기 때문이다)를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독일어권에서 자그레브를 자그레브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오래지 않다.
그것도 공식 담화에서나 ‘자그레브’다. 지금도 독일어권의, 특히 오스트리아의 나이든 사람들에게 이 도시는 자그레브가 아니라 ‘아그람’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 동유럽에 오지 못한 셈이었다. 동유럽을 보기 위해선 베오그라드로 가야 한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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