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생활을 접고 새롭게 시작한 곳은 국내 유일의 재보험사인 코리안리였다.(당시는 대한재보험이었고 2002년에 현재 이름으로 바뀌었다) 보험에는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던 터라 내심 자신이 있었다.
보험과의 인연은 국내 보험업의 태동기였던 1970년부터 시작됐다. 나는 당시 2년6개월을 재무부 손해보험담당으로 일했다. 금융권의 모든 인허가 권한을 재무부가 갖고 있던 그 시절, 사무관의 힘은 막강했다. 시장경제의 가장 기본이 되는 상품개발 조차 업계가 아닌 재무부 몫이었다. A에서 Z까지 담당 사무관의 손을 거쳐야 일이 될 때였다.
지금은 생각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곤 하지만 30대 초반의 혈기방장한 사무관은 “내 손으로 대한민국 손해보험업의 기틀을 놓는다”는 의욕에 넘쳤다. 고시를 준비하는 기분으로 보험공부에 몰두했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나 업계 임원진과의 첫 회의, 새파란 사무관이 보험업 선진화방안이란 큰 그림을 화두로 꺼내놓자 참석한 임원들의 눈빛에 회의가 역력했다.
그러나 논의가 무르익어 보험의 전문적인 영역으로 얘기가 진전되자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업계 임원 한 분은 쉬는 시간에 내 곁으로 다가와 “보험에 대한 깊이와 열정에 놀랐다. 잘해보자”며 격려하기도 했다.
결국 1979년 업계 대표단과 함께 미국 보험시장을 둘러보고와서 작성한 보고서가 보험근대화 작업의 기초가 되었다. 보험회계 처리기준을 마련하고, 보험요율의 표준화, 약관정비, 모집질서 정화, 임원자격 요건 강화 등 현 보험산업의 큰 틀이 그 때 놓여졌다.
세월이 흘러 20년이 지난 1998년7월, 코리안리의 CEO로 내정된 나는 맨 먼저 회사의 경영상황을 훑어보았다. 깜짝 놀랐다. 외환위기 영향으로 좋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심한 줄은 몰랐다. 그대로 가면 1년안에 공적자금을 받거나, 문을 닫아야 할 판이었다.
사실 국내 재보험은 1970년대 중반이후 20여년간 정부 보호 속에 성장해온 독점 산업이다. 국내 각 손보사들은 덩치가 큰 보험물건의 경우 국내 재보험에 가입해야 하는 의무조항이 있었기에, 재보험 영업은 ‘땅 짚고 헤엄치기’로 통했다.
그러나 시장개방 여파로 1996년 의무조항이 풀리면서 독자적 영업력을 키우지 못했던 코리안리는 큰 타격을 입게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기업부도가 속출하자 보증보험회사로부터 받아놓은 회사채지급보증 재보험이 대량 부실화되었던 것이다.
영업력 약화라는 내환에 외환위기라는 거대한 해일이 덮친 격이었다. 회기말 예상 손실규모가 2,800억원이라는 말을 듣고는 가슴이 턱 막혔다. 코리안리는 3월에 회기가 끝나는 3월 결산법인.
7월에 취임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다음해 3월까지 8개월 뿐이었다. 이 기간에 내ㆍ외환을 막지 못하면 침몰이 불보듯 뻔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내가 8개월 안에 이 회사를 되살릴 수 있을까? ‘낙하산 인사’라는 오명만 얻고 길거리로 나앉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고민으로 밤잠을 설치던 중 노조위원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취임전 미리 얼굴을 보자는 것이었다. 말은 정중했지만 관료출신 CEO의 기선을 꺾자는 의도가 분명했다. ‘회사는 파탄일보 직전인데, 노조가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오기가 뱃속으로부터 목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코리안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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