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 직후인 1395년 태조는 태안반도에 운하를 팔 만한 곳을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조세로 거둬들인 양곡을 실어 나르는 조운선이 안흥량(安興梁)에서 침몰하는 일이 잦았고, 이 때도 경상도 조운선 16척이 침몰해 재정 타격이 컸다.
서해 연안 해로의 길목인 안흥량은 '난행량(難行梁)'이라는 옛이름처럼 뱃사람들의 두려움을 자아냈다. 이 때문에 태안반도를 가로질러 안전한 뱃길을 확보하려는 운하 건설은 고려 중기부터 시도됐으나 실패를 거듭했다. 태조도 "땅이 높고, 돌이 단단해서 어렵다"는 보고를 받았다.
■ 태안반도 운하 구상은 태종 12년(1412년)에 부활했다. 태종의 총애를 받던 하륜(河崙)이 고려 때의 난공사 구역을 '계단식'제방으로 처리하면 된다며 운하 건설을 강력히 주장했다.
낮은 곳은 운하를 파서 바닷물을 끌어들이고, 그 끝에 큰 연못을 만들어 배를 정박시키고, 지세가 높은 곳은 여러 단계의 제방을 쌓아 물을 가두어 두고, 화물은 제방 아래 배에서 제방 위의 배로 옮겨 싣자는 것이었다. 갑문식 운하와 형태는 비슷하지만 배가 아니라 짐을 수직으로 이동시켜야 하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 현지 조사와 도면 작성을 거쳐, 이듬해 2단계까지의 제방공사가 끝났다. 남쪽 1단계 제방은 높이가 18척(1척은 30.3㎝), 수로 너비가 40척, 수로 길이가 470척이고, 남쪽 2단계 제방은 각각 18ㆍ40ㆍ100척, 북쪽 1단계 제방은 18ㆍ40ㆍ200척이었다.
양쪽의 1단계 제방 아래 커다란 연못도 만들고, 남북 연못으로 이어지는 운하도 길이와 너비 각각 2,290ㆍ130척, 925ㆍ50척으로 만들었다. 공사의 순조로운 진행은 거기까지였다. 3ㆍ4단계 제방 축조 및 제방 내부 운하 건설이 지연되는 가운데 운하의 효용성을 둘러싼 논란이 무성해졌다.
■ 현지 책임자인 충청관찰사의 강한 반대론에도 불구하고 하륜과 그 추종자들은 수만 명을 동원해 몇 년 동안만 공사를 하면 된다고 맞섰다. <조선왕조실록> 은 태종이 1416년에 내관을 현지에 파견, 운하 공사의 타당성 여부를 보고토록 했다는 내용을 끝으로 관련 기록을 싣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
이 해에 하륜이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했다가 곧 세상을 떴으니, 더 이상 추종자가 나설 이유도 없었겠지만 태종의 중도 포기 결단을 짐작하게 한다. 연말 대선을 앞두고 '한반도 대운하'구상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고 있다. 그 타당성을 최종 판단해야 할 유권자들의 진지하고 냉철한 눈길이 요구된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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