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칼럼에서 '민주주의는 지금껏 도입해본 갖가지 다른 정치제도를 빼고선 가장 나쁜 정치제도'라는 문구를 읽었다.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증명된 경쟁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온갖 모순과 역설을 안고 있는 허점 투성이 제도다. 이 말을 지난 세 번의 우리나라 대선에 오버랩 시켜보면 더 실감이 난다.
3당 합당이 없었으면 군정을 종식한 문민정부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야권은 김영삼, 김대중씨에 의해 계속 분열돼 군부 또는 문민의 탈을 쓴 군부에 또다시 정권을 헌납했을 거라는 게 중론이다. 하지만 3당 합당이 가져온 국민적 가치관의 혼란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국민의 정부에 의한 50년만의 수평적 정권교체도 김대중, 김종필씨의 DJP연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호남과 충청의 지역연대라는 것도 전근대적이지만, 정치이력이 극과 극인 두 사람의 결합은 아예 황당했다.
정치의 세대교체를 이뤄냈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은 어땠나. 과장해서 말하면, 공통점이라곤 '한국사람'이라는 것밖에는 없는 정몽준씨와의 '야바위 여론조사' 한판으로 이뤄졌다.
저마다 한국 정치사의 한 획을 그은 세 번의 대선이 한번도 빠짐없이 건전한 상식을 뭉갠, 아주 비(非) 교육적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아무리 세력연합이 대선승리 법칙이라곤 하지만, 도가 한참 지나쳤다. "정치는 다 그런 것"이라는 말이 새삼 떠오르고, 민주주의 선거가 마냥 아름다운 제도는 아님을 실감케 된다.
이런 경험이 12월 대선을 바라보는 국민의 태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지금의 일방적 판세는 역대 대선에서 전례가 없고, 정권에 대한 평가는 좀체 회복될 줄 모른다. 그러면 정권이 바뀔 것으로 봐야 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여론조사에선 대다수가 한나라당의 집권을 점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대외적 답변일 뿐이다. 상당수가 "찬바람 불어봐야 안다"고 생각한다."승부는 결국 51대 49로 갈릴 것"이라는 전망은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지지자들 사이에 차이가 없다.
이 현상은 '대선 드라마 쇼크'로 설명이 된다. "이번에도 뭔가 상상을 초월하는 깜짝 쇼가 벌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아니면 두려움이 판단을 유보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세 번의 대선에서 쌓인 강력한 학습효과다.
사실 올해 여권이 다시 드라마를 쓰기에는 상황이 너무 나쁘다. 그래도 노 대통령과 김대중씨는 대선 기간 내내 이회창씨와 엎치락 뒤치락 한 유력 후보였다. 여기에 깜짝 쇼가 얹어져 승리를 거뒀다.
현재 여권은 그런 밑천이 없다. 한나라당 출신인 손학규씨가 5%안팎의 지지율로 범 여권 대선주자 중 1위를 기록 중이니 더 말이 필요 없다. 여권의 세력판도라는 것도 노 대통령이라는 개인에 대한 시각을 기준으로 친노와 비노로 나뉘는, 저열한 수준이다.
그저 '반(反) 한나라당'으로 정권을 먹겠다는 발상도 치졸하다. 정권의 위기를 부른 장본인인 노 대통령은 대선 무대에서 비켜설 줄 모른다. 과거 대선에서 얻은 경험적 분석 틀로는 희망을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호기심의 관성은 멈추지 않는다. 도대체 또 무슨 일을 바라는 것일까. 우습고도 처량한 자화상이다.
유성식 정치부장 ssy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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