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지금까지의 내 삶은 크게 세 단계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태어나서 직장을 잡기까지 준비 기간일 것이고, 두 번째는 재무관료 시기, 그리고 세 번째는 지금의 CEO 시절이다. 이렇게 따지면 내 63년은 29-25-9년으로 쪼개진다.
삶의 궤적이 뚜렷하게 잡혀 명쾌하기는 한데, 시간을 숫자로 치환하는 일은 늘 부질없다. 인생은 매 시간 긴장하고 사는 게 아니어서 집중도가 떨어질 때가 있는가 하면, 하루를 1년처럼 압축해서 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람도 나무처럼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며 자신만의 나이테를 만들어가는 법이다.
겨울 나이테가 야물듯, 집중력을 발휘해서 신산(辛酸)의 고비를 하나하나 넘기고 나면 스스로 강해지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런 점에서 재무관료 25년은 나에게 큰 축복이었다.
야근을 강요하는 상사는 없었다. 다만 퇴근 무렵 보고서 작성을 지시하곤 내일 출근하자마자 보자는 국ㆍ과장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NO”라고 말하는 사무관, 서기관은 보지 못했다.
업무량이 폭주해도 일을 나누기보다 하나라도 더 하려고 경쟁했다. 강한 승부근성에서 비롯되는 도전과 열정, 그러나 치기(稚氣)와 무모함은 용납하지 않는 책임감이 한데 어우러져 팽팽한 긴장과 균형이 유지됐다.
숨 막히는 긴장은 매년 한 번씩 열리는 국 대항 축구대회에서 분출되곤 했다. 일 욕심이 축구에도 이어져 매 경기마다 부상이 속출하고 열혈 사무관이 상대편 국장에게 몸으로 어필하는 해프닝도 적지 않았다.
그 와중에 나는 ‘터프가이’로 불렸다. 재무부에서는 ‘별종’에 속하는 해병대 출신인데다, 솔직하고 딱딱 부러지는 성격 탓에 윗사람들에게도 할 말은 꼭 하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렸다. 승진이나 인사 불이익을 걱정하는 이도 있었지만, 운이 좋았던지 동기 중에서 승진도 빨랐고 요직이라는 총무과장도 거쳤다.
총무과장을 할 때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이 통합됐다. 1994년 겨울, 이른바 ‘공룡부처’인 재정경제원의 탄생이었다. 예산과 금융, 세제에서 기획, 대외통상, 국고와 물가관리 등에 이르기까지 경제정책의 주요 기능이 집중되다 보니 보직과장이 60명이 넘는 거대 조직이 되었다.(재경원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 금융감독위원회 등 3개 부처로 다시 쪼개진다)
재경원 총무과장 자리를 이어받은 나는 통합과정의 잉여인력을 정리하는 악역(?)을 맡아야 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인사압력이 들어오는 바람에, 직을 내걸고 한바탕 말다툼을 벌인 기억도 있다.
국가경제의 일익을 맡아 주요 정책이 내 손을 거친다는 자부심으로 유지해온 삶의 긴장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탁 풀려버렸다. 재경원에 대한 여론의 질타에 앞서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먼저 찾아왔다.
나라경제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경제관료로서 나의 잘못은 무엇인지, 30,40대와 50대의 절반을 쏟아 부었던, 힘들어도 보람과 긍지로 이겨냈던, 그러면서 앞만 보고 달려왔던, 그 간의 내 삶을 비로소 찬찬히 되돌아보는 반성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오랜 고민 끝에 나는 결단을 내렸다. 새 장에 안주하기 보다는 위험과 기회의 땅, ‘시장’으로 뛰어나가 다시 도전하기로 말이다. 쉰 넷의 어느 여름, 내 삶의 세 번째 마디가 시작된 것이다.
코리안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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