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4, 3, 2, 1 …, 와!"
30일 오전 11시20분 경북 포항시 포스코 포항제철소 파이넥스 설비 앞. 노무현 대통령과 이구택 포스코 회장이 파이넥스 상용화 설비 준공식장에서 스위치를 누르자 파이넥스 용융로의 출선구(出銑口, 쇳물이 나오는 곳)가 열리면서 시뻘건 쇳물이 쏟아져 나왔다.
포스코가 독자 개발한 파이넥스 공법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쇳물이 세상에 공식적으로 첫 선을 보인 것. 1,200도의 새로운 쇳물은 휘황찬 불꽃을 일으키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포스코가 새로운 철강 시대를 연 순간이다.
포스코의 파이넥스 상용화 설비는 14세기 고안된 뒤 19세기 이후 세계 철강업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해온 용광로 공법을 대신할 것으로 기대되는 차세대 신기술로 평가받고 있다.
용광로 공법은 철광석과 유연탄을 용광로에 넣기 전에 미리 덩어리 형태로 가공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환경 오염 물질이 많이 발생하고 제조비용도 많아 수많은 철강업체들이 이를 타개하기 위한 신기술에 도전했다.
그러나 모두 성과를 얻지 못한 반면 포스코는 대규모 상용화에 성공한 것이다. 포스코가 혁신 기술로 세계 철강업계의 오래된 난제를 해결함으로써 우리나라는 앞으로 세계 철강 기술을 선도하는 핵심 기술을 확보하게 됐다.
파이넥스 상용화 설비는 포스코의 경쟁력을 강화해주면서 미래 성장 가능성을 더욱 높여줄 것이라는 데 커다란 의미가 있다.
이 공법은 철강 제조 공정이 단순하고, 원료의 사전 가공 공정에서 발생하는 환경오염 물질 방지 설비가 불필요한 게 최대 장점이다. 동일한 규모의 용광로를 짓는 것보다 시설 투자비가 20%나 적다. 저가의 원료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어 제조 원가도 용광로 공법의 85% 수준에 그쳐 효율성이 그만큼 높다.
파이넥스는 철광석과 유연탄을 가공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 오염 물질을 예방할 수 있는 친환경 기술이란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황산화물(SOx)과 질소산화물(NOx) 발생량을 용광로 공법에 비해 3~1% 수준으로 낮출 수 있다. 비산먼지 발생량도 28% 수준으로 크게 줄일 수 있다. 포스코 관계자는 "철강산업도 환경친화 산업이 될 수 있다는 인식 전환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상용화에 성공한 파이넥스 설비는 그 동안 용광로의 특성상 사용할 수 없었던 알루미나(Al2O3)나 아연(Zn) 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철광석도 원료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원료의 무제한 사용이라는 세계 철강업계 또 하나의 숙원을 해결한 것이다.
연산 150만톤 규모의 파이넥스 상용화 설비를 준공한 포스코는 2010년 포항제철소 소형 노후 용광로들을 차례로 파이넥스 설비로 교체할 예정이다. 설비 교체 후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고 환경친화적인 철강업체로 거듭나게 되는 셈이다.
파이넥스 설비에는 모두 1조600여억원이 투자됐고, 기본설계는 오스트리아의 푀스트 알피네사가, 공사설계와 시공은 포스코건설이 맡았다. 포스코는 그 동안 집적한 파이넥스 관련 기술을 보호하기 위해 국내 224건, 해외 20여개국에서 58건의 특허도 출원한 상태다.
포항=박일근 기자 ikpark@hk.co.kr사진 포항=최종욱기자 juchoi@hk.co.kr
■ 파이넥스 공법이란
지난 100여년간 가장 경쟁력 있는 제철 공법으로 애용돼온 용광로 공법은 적지않은 단점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철광석과 유연탄을 용광로에 넣기 전에 미리 덩어리 형태로 가공해야 하는 것이 최대 단점으로 꼽힌다.
용광로 안에서 유연탄을 연소시키며 철광석을 환원시키기 위해선 용광로 밑에서 강한 열풍을 불어넣어 줘야 하는데 가루 형태의 원료를 사용하게 되면 열풍에 의해 원료가 날아가 버리고 통풍도 안 돼 연소율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용광로 공법은 철광석을 덩어리 형태로 만드는 소결(燒結) 공장이나 유연탄을 코크스 덩어리로 가공하는 화성공장이 필요하다.
투자비 부담이 높은 것도 문제지만 이 과정에서 황산화물이나 질소산화물, 분진 등 환경 오염 물질도 많이 발생한다. 80년대 후반 세계 메이저 철강업체들이 용광로 공법을 대체할 21세기형 최첨단 철강 기술 개발 경쟁에 나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한 때 26가지나 제안됐다. 이중 포스코가 파이넥스 공법으로 가장 먼저 대규모 상용화에 성공했다. 파이넥스는 가루 형태의 철광석을 유동로에 투입, 환원반응으로 철 성분을 분리해낸 뒤 용융로에서 유연탄과 녹여 최종 쇳물을 만든다.
가루 철광석을 유동로내에 띄워 바로 환원하는 '유동환원조업기술'이 핵심이다. 파이넥스라는 말도 가루를 뜻하는 파인(Fine)에서 비롯됐다.
파이넥스 공법은 고로 대비 설비 투자비는 20%, 제조 원가는 15%나 절감할 수 있어 꿈의 제철 기술로 불린다. 환경 오염 물질도 고로에 비해 크게 줄일 수 있어 친환경 기술로 각광받고 있다. 덩어리 형태로 잘 뭉쳐지는 고점결성 유연탄은 세계 석탄 매장량의 15%에 불과해 원료 고갈 위협에 직면한 상태다.
이안 크리스마스 국제철강협회(IISI) 사무총장은 "파이넥스는 세계 철강산업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며 "포스코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세계 철강 업계를 선도하는 경쟁력을 확보했다"고 평가했다.
■ 파이넥스 쇳물 나오기까지
포스코가 파이넥스 공법으로 쇳물을 뽑아내는데는 숱한 시행착오와 어려움을 겪었다.
세계 철강업계 후발 주자였던 포스코는 1973년 조업 개시 이후 선진 철강 기술을 따라가는 데에 급급했다. 해외연수 등을 통해 어깨 넘어 배운 기술들을 현장에서 고도화시키는 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일본은 한국산 철강재가 장차 일본 시장을 위협할 수 있다며 의도적으로 기술 이전을 기피했다. 결국 포스코는 독자적인 원천 기술 확보에 나서기로 했다.
포스코는 77년 기술연구소를 설립한 데 이어 86년과 87년 포항공대와 포항산업과학연구원을 잇달아 설립, 산ㆍ학ㆍ연 연구개발 체제를 구축한 뒤 92년 본격적인 파이넥스 연구에 나섰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처음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98년까지 700여억원을 투입한 결과는 지지부진 그 자체였다. 개발담당자들이 최종 개발까지 대규모 투자가 더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자, 사내외에선 회의론이 일기 시작했다. 연구소 단위에서 추진하던 기술개발을 현장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1,000억원 이상을 연구비로 더 투입해야 했다.
포스코의 기술 연구원들은 확신에 찬 태도로 경영진을 설득했고, 경영진은 성공보다 실패 가능성이 높았지만 당장의 경제성 보다는 미래의 기술 경쟁력 확보 차원에 결단을 내렸다.
이에 따라 98년부터 기술 연구소 차원에서 연구되던 파이넥스 공법을 제철소 현장으로 끌고 나오게 됐고, 99년 하루 생산량 150톤의 파이넥스 시험 공장을 가동하게 됐다. 이어 2003년 5월 상업화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는 연산 60만톤 규모의 데모 플랜트를 가동하는 데에 성공했다.
경영진의 과감한 투자와 기술진의 혼신의 힘을 다한 기술개발 노력, 엔지니어들의 밤낮을 가리지 않은 열정이 한데 어우러져 연산 150만톤의 대규모 상용화 파이넥스 설비가 세상에 나온 것이다.
포스코가 연구ㆍ개발에 착수한 92년 이후 투입된 기술ㆍ연구 인력만 600명이 넘는다. 이 중에서도 지난 14년간 파이넥스 공법 개발을 총괄한 이후근 파이넥스연구 개발추진반장은 파이넥스의 산증인으로 꼽힌다.
이 반장은 "현장 기술진과 연구진, 조업 정비요원의 피나는 노력 하나 하나가 포스코만이 갖고 있는 소중한 자산이자 기술력"이라고 말했다. 또 김득채 파이넥스건설 담당실장, 주상훈 엔지니어링그룹 리더, 배진찬 공장장도 파이넥스 설비를 상용화시킨 또 다른 주역들이다.
박일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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