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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12> 코르도바 -르네상스의 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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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12> 코르도바 -르네상스의 자궁

입력
2007.05.29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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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 반도의 도시들과 작별하기 전에 한 군데만 더 들르자. 지금은 인구 30여 만 남짓의 중간규모 도시에 지나지 않지만, 한 때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수도였던 곳. 온 세상의 지식을 모두 끌어 모으고, 끌어 모은 그 지식을 갈무리해 다시 온 세상으로 퍼뜨렸던 도시. 오늘날의 뉴욕과 보스턴과 워싱턴과 파리를 합쳐놓은 듯했던 도시. 이 도시의 이름은 코르도바다.

어느 코르도바냐고 묻는 독자가 있을지 모른다. 아르헨티나의 코르도바? 아니면 멕시코의 코르도바? 그는 여행깨나 해 본 독자일 테다. 사실 이 행성에는 코르도바라는 이름을 지닌 도시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 아메리카 대륙에만도 코르도바라는 이름을 지닌 지역이 1,000 군데가 넘는다고 한다.

내가 가본 코르도바는 그 가운데 하나밖에 없다. 그 많은 코르도바의 원조 격인 도시, 제2차 포에니전쟁의 영웅이었던 로마 장군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지금부터 2,300 년 전 남부 히스파니아(스페인)에 세운 코르도바 말이다.

묵직한 여행 가방을 끌면서 한 도시를 샅샅이 뒤져 본 적이 있는가? 1993년 봄 내가 그랬다. 코르도바에서. 그것이 순수한 산책은 아니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렇게 거추장스러운 짐을 지닌 채 무거운 몸으로 코르도바를 헤집고 다닐 뜻이 없었다. 산책만을 위한 산책을 원했다면, 짐을 풀고 몸이 가벼워진 다음에야 코르도바 거리를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려면 우선 숙소를 잡아야 했다. 혼자 여행할 때, 나는 갈 도시의 숙소를 미리 예약해놓는 법이 거의 없다. 낯선 도시에 내려 숙소를 찾는 것도 재미라면 재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 따라 일이 쉽게 풀리지가 않았다. 늘 그렇듯 나는 싸면서도 쾌적한 숙소를 원했는데, 그런 숙소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악착같이 그런 숙소를 찾다 보니, 코르도바의 거리와 골목들을 하염없이 헤매게 되었다.

그 날 나는, 한 손에 지도를 들고 다른 손으론 여행가방을 끌며, 코르도바 시내를 줄잡아 네 시간은 걸었을 것이다. 그리 큰 도시가 아니어서, 이미 걸은 길들을 다시 걷기도 했다.

두 시간쯤 걸었을 때 피곤이 몰려오기 시작했지만, 이미 들인 시간이 아까워 아무 여관으로나 들어가기가 싫었다. 그래서 지친 몸을 이끌고 고통스러운 탐색을 계속했다. 그 덕분에 나는, 코르도바에 도착한 당일, 이 도시가 자랑하는 문화유산들을 겉모습으로라도 훑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비아나 후작 부부 궁전, 등불의 그리스도 소(小)광장, 옛 유대인거리의 시나고그(유대교 예배당)와 꽃들의 골목, 세비야의 것 못지않아 보이는 알카사르와 그 규모가 메카의 모스크에 버금간다는 메스키타(모스크) 같은 것들. 나는 이 도시에 머무는 나흘 동안 이 유적들을 좀 더 깊이 살필 것이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직접 감독해 세웠다는 로마인의 다리(Puente romano) 위를 걸어 과달키비르강을 건너서야, 나는 마땅한 숙소를 찾아냈다. 칼라오라의 탑(역사박물관) 근처의 미로 같은 골목 한 모퉁이에서였다.

그 땐 이미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 한 걸음을 내딛는 것도 힘들 만큼 파김치가 돼 있었다. 그나마 운이 좋았다. 하룻밤에 얼마였는지 또렷이 기억나진 않으나, 주인이 처음 부른 값의 반값에 머물기로 했다.

나는 약간 불쌍해 보이는 표정으로 사정을 했을 것이다. 지닌 돈이 넉넉지 않아 그 값은 치를 수 없으니 깎아달라고 말이다. 초라하고 지친 행색의 이방인에게 주인은 호의를 베풀었다. 일층의 파티오(안뜰)가 5월의 꽃들로 화사했던, 내 집처럼 편안한 여관이었다.

짐을 풀자마자 허기가 몰려왔다. 여관 골목 끝머리에 레스토랑이 하나 있었다. 나는 마지막 힘을 내 그 집으로 가 안심스테이크를 시켜 먹었다. 그 식당에서 아마 가장 비싼 음식이었을 게다. 고기와 와인이 위장으로 들어가며 원기는 돌아왔으나, 나는 먹고 마시는 틈틈이 좀 겸연쩍은 마음으로 흘끔흘끔 문 쪽을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여관주인이 이 레스토랑으로 식사하러 오면 스타일 구기겠군! 노자가 부족하다며 숙박료를 반값으로 깎은 나그네의 것으로는 내 식단이 너무 호화로웠던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내 가장 큰 쾌락은 먹고 마시는 데서 온다. 흉하디 흉한 내 식탐이여. 그래서, 여행 중에도 높다랗기만 한 내 엥겔계수여.

로마제국의 도시로 세워지기는 했으나, 코르도바가 세계사적 위용을 드러낸 것은 이슬람시대다. 8세기 중엽부터 수백 년간 코르도바는 이베리아반도만이 아니라 온 이슬람세계의 중심지였다.

적어도 중심지 둘 가운데 하나였다.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삼았던 우마이야왕조의 종실(宗室) 우마이야가문이 칼리프 자리를 아바스 가문에 빼앗긴 뒤 서쪽으로 달아나 후(後)우마이야왕조를 연 곳이 코르도바였기 때문이다.

코르도바는 서칼리프국의 수도로서, 아바스왕조의 동칼리프국 수도 바그다드와 더불어, 사라센제국이라는 타원의 두 초점을 이뤘다.

당시 코르도바에는 백 개가 넘는 모스크와 그 만큼의 공중목욕탕이 있었고, 한 거리 건너 병원이 있었으며, 포장된 거리들은 밤에도 등불로 환했다 한다.

그렇게 많았던 모스크 가운데 가장 큰 것이 과달키비르강 연안에 메스키타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본디 게르만족 서고트왕국의 교회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이 웅장한 모스크는, 기독교도들이 코르도바를 되찾은 뒤에, 그 일부가 가톨릭 예배당으로 개조되었다. 또 메스키타에서 멀지 않은 옛 유대인구역에는 시나고그가 남아있다. 세 일신교의 상징이 한 군데 몰려있는 셈이다.

이런 풍경과 직접적 관련은 없겠지만 이슬람 시대의 이베리아반도는, 기독교도들의 재정복 뒤와 달리, 제한적으로나마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세상이었다. 세금을 물고 다소의 정치적 불이익을 감수하기만 한다면, 기독교도나 유대교도도 제 믿음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세 일신교가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하는 사회였던 것이다.

그래도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겨냥한 개종이 드물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이 드잡이하던 당시 이베리아반도에는 여러 범주의 신자 집단이 존재했다.

이를 스페인어 명칭으로 구분해보면 이렇다. 우선 크리스티아노스(기독교신자)로서 이슬람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모사라베스(‘아랍인들에게 굴복한’이라는 뜻의 아랍어에서 온 말)라 불렀고, 그 가운데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들은 엘체스(‘배교자’라는 뜻의 아랍어에서 온 말)라 불렀다.

비록 기독교 신자들이긴 했지만, 모사라베스도 공적 자리에서는 아랍어를 쓰는 것이 상례였다. 그들의 고유 언어인 모사라베(라틴어에 뿌리를 둔 당대 스페인 남부 지방의 언어)는 기독교 신자들끼리의 사적인 자리에서나 사용됐다.

기독교 지식인들이 ‘라틴어에 가까운 로만어’(romanicum circa latinum)라고 공식적으로 불렀던 이 모사라베 자체도 지배언어인 아랍어에 깊이 감염되었다. 기독교도가 이베리아반도를 되찾은 뒤 모사라베는 카스테야노(스페인어)에 흡수되거나 내몰리며 이내 사어(死語)가 되었다.

모사라베는 로만어 역사-비교언어학자들의 큰 관심거리 가운데 하나지만, 그 언어로 기록된 문헌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당대 아랍어 문헌을 통해서만 그 형태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개종자들은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 사이에서도 나왔다. 모로스(이슬람교도) 가운데 기독교 지배 지역에서 다소 과다한 세금을 내고 살던 이들은 무데하레스라 불렀고, 정치경제적 불이익을 견디지 못해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모리스코스라 불렀다.

또 후이도스(유대교도) 가운데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콘베르소스라 불렀다. 기독교 지배 지역에서도 12세기 말까지는 이교도의 개종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았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세력의 위세가 워낙 컸던 시절이어서, 자기 지역에서 기독교도의 개종을 강요하지 않는 이슬람의 관행을 기독교 세력도 전략적으로 모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게다.

이밖에 마라노스라 불리는 부류도 있었다. 마라노스는 기독교로 개종했으면서도 제 종교 의식(儀式)을 버리지 않은 유대교도나 이슬람교도를 얕잡아 불렀던 말이다. 마라노스라는 말은 ‘금지된’이라는 뜻을 지닌 아랍어에서 나왔다. 돼지고기 먹는 것을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금하는 데서 연원한 말이다.

코르도바는 당대 세계 최대의 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지적 문화적 정점에 있던 도시이기도 했다. 거리엔 도서관이 즐비했고, 온 세상의 일급 학자들이 그리 몰려들었다.

그 학자들은 인도의 수학에서부터 고대 그리스 철학을 거쳐 당대의 첨단 자연과학에 이르는 방대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축적해 르네상스 이후 유럽에 물려주었다. 로마시대의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와 더불어 이 도시가 낳은 가장 유명한 철학자라 할 이븐 루슈드(1126~1198ㆍ유럽인들에게는 ‘아베로에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도 그런 이슬람 지식인 가운데 하나였다.

뒷날 브루노나 스피노자 같은 범신론자들이 다듬어 유럽철학사에서 유명하게 된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ㆍ종교적 의미의 무제약적 존재나 우주질서, 유기적 생산력)과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ㆍ좁은 의미의 자연, 곧 피조물)이라는 개념도 본디 이븐 루슈드의 것이었다.

코르도바를 당대 세계의 지적 메트로폴리스로 삼은 이슬람 학자들의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유럽의 학문적 개화는 훨씬 더 늦어졌을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유럽인들이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를 재발견한 것은 코르도바 학자들의 이런 지적 작업을 매개로 삼은 것이었다.

11세기 말 이후 남하를 계속하던 기독교 군주들은 그 전에 이슬람학자들이 그?봅?라틴어에서 아랍어로 번역해 놓았던 방대한 분량의 고대 그리스-로마 문헌을 카스티야어(스페인어)로 다시 옮기게 함으로써 근대 유럽의 지적 초석을 놓았다.

안달루시아 시인 가르시아 로르카의 <기수의 노래> 를 읽으며 코르도바에, 안달루시아에 작별을 고하자. “코르도바./ 멀고 외로운.// 검은 조랑말, 큰 달./ 그리고 내 안낭(鞍囊)에 올리브./ 비록 나 길을 알아도/ 나는 코르도바에 가지 못하리.// 평원 속으로, 바람 속으로,/ 검은 조랑말, 붉은 달./ 죽음이 나를 보고 있네/ 코르도바의 탑들에서.// 아! 멀기도 하여라!/ 아! 내 장한 조랑말!/ 아! 그 죽음이 나를 기다리리/ 내 코르도바에 가기 전에.// 코르도바. 멀고 외로운.”(정현종 옮김)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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