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법이 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매각 사건으로 기소된 전현직 사장에게 1심과 마찬가지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 삼성그룹의 지배권이 이건희 회장의 장남 재용씨로 이전되는 핵심 과정이 위법적으로 진행됐다는 사법적 판단을 재확인한 것이다.
삼성 측이 상고할 예정이어서 최종 판단은 대법원에서 내려지겠지만 그룹 지배에 대한 도덕적 타격만큼은 면할 수 없게 됐다.
법원은 이 전 회장의 지시여부 등 그룹이 조직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리지 않아 논란의 소지를 남겼다.
CB 갑자기 발행
1996년 말 당시 허태학 에버랜드 사장, 박노빈 상무는 긴급한 자금조달의 필요성이 없는 상황에서 이사회를 소집해 CB 발행을 의결했다. 주식으로 전환할 때 주당 가격을 7,700원으로 정했고 발행 총액은 99억원이었다.
당시 주주였던 중앙일보, 삼성물산, 이건희 회장 등이 우선 살 수 있도록 했지만 대부분의 주주들은 청약하지 않았다. 그러자 허씨와 박씨는 청약 만기일에 이사회를 열어 청약되지 않은 CB 모두를 이건희 회장 자녀인 재용, 부진, 서현, 윤형씨에게 배정하기로 결정했다.
재용씨 등은 배정된 CB 모두를 인수해 주식으로 곧바로 전환했고 결국 재용씨는 에버랜드의 1대 주주(37%)가 됐다.
CB를 헐값에 넘겨
재판부는 허씨와 박씨가 통상의 자금조달 범위를 넘어서면서 재용씨 등 제3자에게 CB를 몰아줘 결국 지배권을 넘겨준 사실이 인정된다고 보고 경영진으로서의 임무를 위배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그 근거로 허씨, 박씨가 정한 CB의 주식 전환가격 7,700원이 현저하게 싸다고 봤다. 항소심 재판부는 비상장사인 에버랜드 주식의 시가가 형성돼 있지 않은 탓에 CB 발행 1년 전 삼성물산과 삼성건설이 거래한 에버랜드 주식 가격을 기준으로 전환가격이 주당 최소 1만4,825원이라고 판단했다.
허씨, 박씨가 최소 186억원 상당의 돈을 끌어올 수 있었음에도 전환가격을 낮게 정해 96억6,000만원을 조달, 89억원 만큼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것이다. 검찰은 전환가격을 8만5,000원으로 봐 손해액이 969억원이라고 기소했지만 일부분만 인정됐다.
1심 재판부는 전환가격에 대해 “현저하게 낮은 것은 인정되지만 정확한 가격을 산정하기 어렵다”며 업무상 배임 혐의를 적용했었다.
하지만 항소심에서는 최소 전환가격을 바탕으로 손해액을 정해 50억원 이상의 손해를 끼쳤을 때 적용되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혐의로 유죄 선고했다. 피고인에 대한 형량이 1심보다 높아진 이유다.
재판부는 이외에도 96년 말 소집된 이사회에 의결 정족수인 과반에 1명 모자라는 8명이 참석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CB발행 의결 자체가 무효라고 판단했다.
공모 여부는 판단 안 해
재판 과정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이 일었던 부분은 그룹 최고위 경영진과 기존 주주들이 CB를 발행하고 권리를 포기하는 과정에서 허씨와 박씨와 공모했는지 여부였다.
검찰은 “최고의 경영진의 지시 없이는 이뤄질 수 없었던 일”이라며 이 회장이 실질적 역할을 했음을 암시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검찰이 제출한 고소장에 이건희 등 주주와 공모했다는 내용이 없다”며 1심 때와 마찬가지로 판단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회사에 손해를 입힌 이상 기존 주주와 공모했는지 여부는 범죄 성립 여하와 관계없다”고 덧붙였다. 법원이 검찰에 이 회장을 사법처리 하려면 공모를 입증하는 추가적인 사실을 밝혀내 기소할 것을 사실상 요구한 셈이다.
최영윤 기자 daln6p@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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