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바둑의 ‘투 톱’ 이창호와 이세돌의 요즘 행보가 사뭇 대조적이다. 이세돌이 당일치기로 한국과 중국을 넘나드는 강행군을 하면서도 씩씩하게 연승 행진을 하는 데 반해, 이창호는 최근 ‘건강이 좋지 않다’는 말까지 나도는 등 최악의 컨디션으로 자칫하면 20년 만에 처음 ‘무관’(無冠)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이세돌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지난 보름동안 치른 공식 대국이 무려 13판으로 거의 매일 한 판 씩 두었다.
이세돌의 최근 일정은 정말 살인적이다. 국내 기사로는 유일하게 중국 갑급 리그 구이저우팀 소속으로 출전하고 있는 이세돌은 12일 중국 상하이에서 창하오와 대국을 가졌다. 그리고는 다음날 아침 부리나케 한국으로 날아와 그날 밤 한국바둑리그에 출전한 것을 비롯, 17일까지 엿새 동안 매일 시합 바둑을 두어 모두 이겼다.
18일 오전 5시 인천공항을 출발한 이세돌은 오전 7시께 베이징에 도착, 비행기를 갈아타고 다시 3시간 가량 날아가 구이저우성 성도인 구이양에 도착했다. 19일 충칭팀의 왕시와 중국리그 대국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20일 오전 6시, 다시 구이양을 떠나 베이징을 거쳐 서울로 돌아 왔다.
헉헉 숨이 찰 정도로 바쁜 일정이다. 그래도 이세돌은 끄떡없는 듯 오히려 여행 도중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무협소설을 수북이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니며 비행기 안에서 읽는다고 한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21일부터 23일까지 물가정보배, 국수전 예선 등에 출전했다가 24일 부처님오신날이 마침 휴일이어서 국내 기전이 열리지 않는 틈을 이용, 잽싸게 베이징으로 날아가 콩지에와 얼른 일합을 겨루고 당일 귀국, 25일 속개된 국수전 예선 일정에 차질 없이 맞췄다. 이쯤 되면 한 마디로 신출귀몰이다.
26일과 27일 오랜만에 이틀간 달콤한 휴식을 취한 이세돌은 28일에 KBS바둑왕전에서 목진석을 제압하고 승자 준결승전에 올라갔다. 이렇게 보름간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치른 대국이 모두 13판. 놀랍게도 12승1패를 기록했다. 1패는 중국 리그에서 왕시에게 진 것으로 국내 기전 공식 기록은 당당 10연승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이세돌의 바쁜 ‘행마’는 중국에서도 워낙 유명해서 최근에 ‘비행전사’(飛行戰士)라는 별명이 붙었다는데 그보다는 좀더 한국식으로 ‘번개돌이’라 부르는 게 어울릴 것 같다.
이창호는 요즘 컨디션이 최악이다. 올해 성적이 16승12패로 승률이 60%도 채 안 된다. 더욱이 최근 10판에서는 5승5패. 한 판 이기면 곧바로 한 판을 내주는 반타작 승부에 그치고 있다. 1986년 프로 입문 이후 정말 이런 적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각종 기전 성적도 신통치 않다.
올해부터 국내 최대 기전으로 거듭난 명인전에서는 벌써 1승3패를 기록, 사실상 우승권에서 탈락했다. 앞으로 남은 대국을 다 이긴다 해도 혼자 힘으로는 우승이 불가능하다. 이밖에 GS배에서 1승1패를 기록하고 있으며 물가정보배에서는 홍성지에게 패하는 바람에 조훈현과의 맞대결에서 반드시 이겨야 겨우 결선에 진출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이다.
25일에는 중국 쓰촨성 청두에서 벌어진 왕위전 도전 1국에서 윤준상에게 어이 없이 역전패 당했다. 이러다가 자칫하면 국수에 이어 왕위까지 내주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마저 자아내고 있다. 이창호가 만일 이번에 왕위 타이틀을 빼앗긴다면 88년 13세의 나이로 KBS 바둑왕전에서 우승, 세계 최연소 타이틀 획득 기록을 수립한 이래 20년 만에 처음 무관 상태가 된다.
이미 여러 차례 보도됐던 대로 요즘 이창호는 건강 상태가 아주 좋지 않다. 우선 외견상으로도 얼굴이 항상 벌겋게 달아올라 있고 몹시 피곤한 모습이다. 대국이 끝나면 완전히 탈진 상태가 되거나 심지어 깜빡 정신을 놓고 쓰러진 적도 있다. 과거 컴퓨터보다 정밀했던 ‘신산’의 모습은 간 데 없고 요즘은 오히려 어이없는 실수로 유리한 바둑에서 역전패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서 이창호는 지난 주 중국에서 열린 왕위전 도전기가 끝난 후 동생 영호씨와 함께 베이징으로 날아가 용하다는 중국 한의사에게 진맥을 받았다고 하는데 과연 어느 정도 효험이 있을 지 궁금하다.
박영철 바둑 칼럼니스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