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마음으로 혼자 다녀오기로 한 산행이었다. 난코스에 초행이었지만 지도도 챙겼고, 가다 보면 동행도 만나리라 믿었다. 무엇보다 산에 자신이 있었다. 재무부 산악반에서 20여 년간 전국의 웬만한 산은 다 훑은 터였다.
그러나 설악동에서 마등령을 지나 공용능선에 접어들자 모든 게 불확실해졌다. 농무(濃霧)를 만난 것이다. 바람이 불면 안개가 걷히며 나타났던 등산로가 바람이 잦아들면 다시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이따금 보이던 등산객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귀신에 홀린 듯 한순간 길이 끊겼다. 어디로 왔는지 가늠조차 안 되었다. 농무와 암벽에 갇힌 것이다.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조난이 이런 거구나. 10여분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나도 모르게 “사람 살려! 누구 없어요!”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길 몇 차례. 어디에선가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결에 뚝뚝 끊겨 정확치는 않았지만 위치를 묻는 듯했다. 암벽에 갇혔다고 소리쳤더니 가물가물 “뒤로”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암벽 뒤로 2~3분 걷다 보니 홀연 등산로가 다시 나타나는 게 아닌가.
재정경제원 국장으로 국방대학원에 파견 가 있던 1996년 늦가을, 쉰 둘 나이에 설악산에서 겪은 일이다.
70여명의 재무부 산악반을 이끌고 한겨울 1월 치악산 등반에 나섰다가 눈에 홀려 조난 당한 경험도 생생하다.
한밤중에 양식도 없이 눈 덮인 계곡에 몇 시간을 갇혀있다 비상수단으로 파수꾼 두 명을 선발해 양 쪽 산 정상으로 올려 보내 불빛을 보고 간신히 방향을 잡아 탈출했다. 다들 쫄쫄 굶고 있는데 일행 몇이 초콜릿을 몰래 먹는 걸 보고 쓴웃음을 지었던 추억이 있다.
70년대초 사무관 첫 발령부서는 재무부였다. 소문대로 1등만 모인다는 만만치 않은 곳이다.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는 엘리트 의식이 조직을 견인하는 힘이었다. 대부분 업무가 완전경쟁에 의해 추진되었다. 업무능력은 기본이어서 일 못하면 ‘왕따’가 된다. ‘졸면 밀린다’는 자신에 대한 강박감과 ‘눈 깜짝할 사이에 코 베어간다’는 남에 대한 경계감이 묘한 시너지를 일으켜 강한 업무추진력으로 승화되곤 했다.
‘대충 대충’을 참지 못하는 완벽주의가 자연스레 몸에 배었다. 경쟁 속에서 업무를 익히고 성과로 평가 받는 풍토가 마음에 들었다.
재무부에 근무하던 시절 등산은 나에게 취미가 아닌 성스러운 의식과도 같았다. 한 주간 쌓인 스트레스를 배낭에 담아 등에 진 채 산으로 걸어 들어가 한 걸음 한 걸음 다 버리고, 내려올 때는 가슴에 바람을 실어온다.
그리고 그 힘으로 다시 업무에 전념하는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70년대 후반의 보험 근대화작업, 80년대 초반 사채양성화를 위한 투자금융사 신설 등 굵직굵직한 국가 프로젝트에 매달려 며칠씩 밤을 샐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산과 들에서 얻어온 ‘야성의 힘’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지금도 빡빡한 일정을 쪼개 산에 오른다. 집 근처 텃밭을 빌려 방울토마토, 고추, 참외, 수박 등속을 심어놓고 아침저녁 내다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것은 내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나 스스로 자연에 동화되어 그 힘으로 일상을 살아가기 위한 생존본능인지도 모르겠다.
코리안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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