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의 미국 상륙 4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이 달초 미국을 방문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여행기간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계산, 이를 상쇄할 수 있는 만큼의 나무를 심겠다고 했다. 올초 영국에서는 제품 생산에 얼마나 많은 이산화탄소(CO₂)가 배출됐는지를 기록하는 ‘탄소 발자국’(carbon footprint)을 붙이자는 캠페인이 시작됐다.
탄소 발자국은 경제활동이나 일상생활 중에 얼마나 많은 CO₂를 발생시키는지를 추적하는 개념이다. 환경재단 환경경영연구소와 공동으로 출ㆍ퇴근 때 교통 이용수단이 각기 다른 검찰 간부와 대기업 부장, 회사원, 공무원 4명의 탄소 발자국을 따라가 봤다.
서울서부지검 최석두 부장검사는 CO₂를 잡는 검사다. CO₂를 잡는다고 해서 배출가스 기준을 초과한 공해기업을 처벌하는 검사라는 뜻이 아니다. 자전거를 이용해 출ㆍ퇴근 하는 ‘자출족’이 되면서 CO₂발생량을 ‘0’으로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오전 5시30분 일어난 그는 6시10~20분 사이 서울 강남구 개포동 집을 나선다. 예사롭지 않은 복장이다. 하늘색 헬멧에 고글, 몸에 꽉 끼는 사이클 복장은 이제 자전거를 막 탄 ‘초자’는 아닌 듯 하다.
집을 나선지 5분이 채 되지 않아 최 부장검사는 양재천 자전거 전용도로로 진입한다. 갈 길은 멀었는데 몸이 아직 덜 풀렸는지 다리가 벌써 뻐근하다. 하지만 숨을 들이 쉴 때마다 강변의 상큼한 공기가 가슴 깊이 파고 든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반포대교가 눈 앞에 들어 온다. 절반 이상 주파했다. 집에서 출발한지 30분 이상 지나자 한강변을 따라 출근하는 ‘자출족’들도 점차 눈에 많이 띈다.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1시간 가량 달리니 어느덧 마포대교까지 다 달았다. 여기서부터는 난코스다. 자전거 전용도로가 없어 인도를 이용해야 한다. 7시20분께 사무실인 공덕동 서부지검에 도착한 최 부장검사는 라커룸에서 와이셔츠, 양복을 꺼내 들고 샤워장으로 향한다. 구내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마친 그는 이렇게 하루 업무를 시작한다. 그는 매일 자전거로 출ㆍ퇴근을 하고 싶지만 비가 오거나 저녁 늦게까지 일에 매달려야 할 땐 지하철을 이용한다. 그는 “자전거로 출ㆍ퇴근하면 CO₂배출량을 줄이는 장점도 있지만 특별히 운동할 시간이 없어 운동 겸 해서 자전거를 즐겨 타고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의 정모 부장은 여느 때처럼 변함없이 3,500cc급 대형 승용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입사 19년차인 그는 승용차 출ㆍ퇴근이 몸에 배었다. 입사 초기부터 콩나물 시루 같은 지하철이 너무 싫어 승용차를 구입했다. 대중교통으로 출ㆍ퇴근 하는 경우는 부득이하게 승용차를 이용할 수 없을 때지만 경우는 드물다.
임원이 되면서 부하 직원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그에게는 승용차가 무척 편리하다. 서울 서초구 집에서 마포 사무실까지 20분. 막혀도 30분 내에 도착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기 때문에 집에서 사무실까지 가는 버스 노선이나 지하철 환승 방법도 잘 모른다.
부원들과의 회식 날 술을 마실 경우엔 반드시 대리운전이다. 다음날 아침 일찍 출근하기 위해선 반드시 차를 가지고 다녀야 한다.
그에겐 퇴근시간이 딱히 정해지지 않았다. 사내 전국 1위의 매출 실적을 유지하기 위해 밤 늦은 시간에도 지지치 않은 열정으로 일에 몰두한다. 밤늦은 시간 퇴근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걷지 않아서 좋고, 연말 같은 때 ‘택시잡기 전쟁’을 하지 않아서 좋다고 정 부장은 말한다. 궂은 날씨에도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출발해 사무실 지하주차장으로 도착하기 때문에 비 한 방울 맞지 않는다.
맞벌이인 그는 두 딸과 지낼 시간이 별로 없어 주말이면 교외 나들이를 즐긴다. 물론 교통수단은 3,500cc 승용차다. 휴가철에도 승용차를 이용해 전국을 누빈다. 그는 “아침 일찍 출근하고 밤 늦게 퇴근하기 때문에 대중교통이 불편하다”며 “지금은 업무가 너무 많아 시간을 아끼기 위해 자가용으로 출ㆍ퇴근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회사원 정승교 대리의 승용차는 무용지물이나 다름 없다. 결혼한 지 1년이 지난 입사 8년차의 자가용을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출근 수단은 지하철이다.
정 대리의 출근 경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서울 노원구 상계1동에서 사무실인 중구 남대문로까지 오가기 위해선 산 넘고 물 건너야 한다. 지하철 7호선 수락산 역에서 출발한 그는 노원에서 4호선으로 환승한다. 동대문운동장에 도착하면 2호선으로 다시 갈아타야 한다. 집에서 회사까지 출근 시간은 1시간 10분 정도 걸린다.
직급상 회사 주차장을 이용할 수 없는 그는 승용차를 타고 싶어도 탈 수 없다. 회사 인근 주차장을 이용하려면 월 사용료로 20만원 이상 내야 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맞벌이인 그는 1시간 이상 걸리는 출근 시간이지만 지루하지 않다. 아내의 직장도 남대문 근처여서 연애시절 데이트하는 기분으로 출근한다.
아파트 대신 오피스텔에 사는 정 대리가 자신의 1,500cc급 승용차를 이용하는 경우는 한 달에 한 두 번밖에 없다. 아내하고 교외에 나갈 때다. 본가가 있는 잠실에 갈 때도 어김없이 지하철을 이용한다. 먹거리를 챙겨야 할 때도 있지만 본가에 가면 술을 한 잔해야 하고, 운전이 서툰 아내에게 핸들을 맡기는 건 그리 내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택시도 잘 이용하지 않는다. 회사 근처에서 늦게까지 술을 마셔도 교통수단은 변함없이 지하철이다. 택시비가 2만원 넘게 나와 부담스럽다. 정 대리는 “상계동에 신접살림을 차려 출ㆍ퇴근 시간이 조금 길어졌지만 아내와 함께 출근해 별로 힘들지 않다”면서 “자동차를 너무 사용하지 않아 엔진에 문제가 생길 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환경부 조영두 사무관은 아예 자가용이 없다. 1998년 지방 근무를 마치고 환경부 본부로 자리를 옮기면서 자동차를 처분했다. 그는 98년 발령이 나자 정부과천청사가 있는 경기 과천시로 이사했다. 딱히 수도권에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왕이면 사무실에서 가까운 곳에 살아야 편리하다고 판단해 과천에 자리를 잡았다. 주거환경도 좋아 자녀 교육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집에서 사무실까지 거리가 2㎞도 채 되지 않아 걸어서 출ㆍ퇴근 한다. 사무실이 가까워 자동차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조 사무관은 말한다.
하지만 승용차가 없어 막내의 불만을 해소하지 못해 안타깝다. 세 자녀 가운데 두 명은 대학생이 돼 부모와 함께 여행할 기회는 거의 없어졌다. 중학생인 막내의 입장은 다르다. 주말이면 부모와 함께 승용차를 타고 놀러 다니는 친구들과 처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나들이 때마다 버스나 지하철만 이용해야 하다 보니 막내와의 외출 기회가 줄어들었다.
전남 순천 출신의 조 사무관은 명절이나 휴가 때면 기차나 고속버스를 이용한다.
출ㆍ퇴근뿐 아니라 조 사무관의 ‘탄소발자국’은 평범한 직장인에 비해 뚜렷하지 않다. CO₂배출량이 현저히 낮다. 아파트 면적은 18평, 가족은 5명이다. 환경부와 녹색연합 홈페이지에 있는 CO₂ 배출량 계산법에 따라 조 사무관 가정에서 배출된 CO₂를 집계하면 대형 승용차로 출ㆍ퇴근하는 정모 부장의 3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조 사무관은 “직장과 집이 가까워 하루 2시간 이상을 벌 수 있다”면서 “근면 검소하게 생활하면 가정에서 배출되는 CO₂발생량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본보-환경재단 공동기획
송두영 기자 dy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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