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정치에 대한 저항… 통일을 향한 꿈… 최근 10년간 글 모은 회고담우주의 사투리 / 고은 지음 / 민음사 발행ㆍ488쪽ㆍ2만5,000원
“만약 1970년대가 없었다면 내 문학은 어느 한쪽 골짜기에서 피 한 방울 없이 피 울음 우는 소쩍새의 밤이었다가 말았을 것이다.”
그는 “정치로부터 격리됨으로써 도리어 그 정치에 충성스러운 현실 도피의 슬픈 초상”을 비로소 쳐다보게 된 것이다. “순수라는 미망과 참여라는 교조는 그것을 다 넘어서서 새로운 생명력을 발휘할 문학의 역설적인 두 지표다.”
고은(74ㆍ사진) 시인이 회고록 <우주의 사투리> 를 냈다. 신문 지면과 강연 원고 등 최근 10여년 간 글과 말의 형태로 발표해 온 생각의 궤적을, 생생한 회고담과 함께 모았다. 우주의>
“1950년대의 원죄와도 같은 허무주의, 1970년대 이래 20년 이상의 현실에의 투신과 저항 그리고 오늘의 ‘화엄’이라는 종합”(333쪽)이라며 스스로 정리하는 문학 인생의 축도가 펼쳐진다.
한국과 세계에 대한 체험적 전망으로 가득찬 이 책은 ‘참여라는 새로운 광야’로 나아갔던 시간을 음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젊은 날의 광야는 거칠었다. 간호하던 누나를 전염시켜 목숨을 앗은 폐결핵 2기, 폭음과 하루 두 갑은 족히 피워댄 담배가 남긴 흔적 등으로 점철된 젊은 날은 철저히 지양됐다.
1980년 5월 18일 0시 30분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지하 2층에서 겪은 엄청난 폭력은 젊은 시절 네 번이나 시도했던 자살 미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경험이었다. 죽자는 결심 직전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자살을 만류했고, 이감된 육군 교도소에서 시인은 <백두산> 과 <만인보> 를 구상했다. 만인보> 백두산>
통일에의 꿈은 세계로 나아갔다.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 온몸으로 가자 / 허공 뚫고 가자.” 1970년대 중반에 창작, 80년대에 절창된 시 <화살> 을 회고한 2004년 프라하 국제문학축제 강연, 분단 모순을 밝히는 것과 통일을 꿈꾸는 것이 한국 문학 최대의 과제라고 재삼 확인한 2005년 미국 하버드대 강의 등은 그것이 세계적으로 어떻게 꾸준히 설파돼 왔나를 밝혀준다. 화살>
그것은 “지구상에서 가장 커다란 증오와 대결의 장소인 남한과 북한”의 통일과 몸을 맞대고 있다.
그에 의하면 남과 북은 내장공동체(內臟共同體)다. 그는 “통일은 우리와 관련된 국내외적인 역할을 함께 묶어낼 때에만 그 보편성의 높은 품질을 보장 받을 수 있을 것”이라며 “쌍방의 엄청난 군비 예산을 분단 극복의 복지에 전용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그럴 때, 군사력은 통일 국가 안보의 전신이라는 명예를 누릴 수도 있다는 ‘다연방제 통일론’이 열띤 어조로 실려 나온다.
그는 시의 힘으로 영원히 갱생한다. 2007년 마드리드에서 스페인 시인 안토니오 콜리나스와 함께 가졌던 강연회는 그의 시혼으로 빛났다.
그는 “언제나 처녀작의 시인이고 싶고, 이제 막 태어난 시인이며, 이제 막 나에게 어느 뮤즈가 보낸 시를 받아들인 시인이고 싶은 것”이라며 시에의 설렘을 밝혔다. 책은 인디애나대, 하버드대, U.C.데이비스대 등지에서의 강연록과 함께 게리 스나이더, 알렌 긴스버그 등과의 시연(詩緣)도 상세히 보여 준다.
새 천년은 노시인에게 무엇일까. 한 신문에 실은 2000년 원단 신년사에서 “새해라 해서 한국의 정치가 수준 높은 품위를 보여줄 것도 아니다”며 “(새 천년은) 지난 세기의 사생아가 아니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그는 썼다. 핵을 둘러싼 국제 정세까지 겹쳐, ‘품격’을 거부하는 정치판은 그의 우울한 통찰 앞에 무력하다.
장병욱기자 aj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