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차고 기울어져 여름을 부르는 이때. 해발 1,300m 이상의 산정엔 이제 막 초봄이 깃들고 있다. 고원의 나뭇가지엔 신록의 눈부신 초록이 곱게 물들어가고, 수풀 속에는 수줍게 피어난 야생의 들꽃이 보물처럼 반짝이는 고운 자태를 숨기고 있다.
고원의 들꽃을 찾아 떠난 곳은 강원 정선의 백운산 자락. 산의 높이는 해발 1,426m이지만 정상까지 오르는 길은 힘겹게 헐떡거릴 필요가 없다. ‘곤돌라’라는 축지법을 부리면 1,334m까지는 한걸음. 걸어서 오를 남은 높이는 100m도 채 되질 않는다.
백운산은 강원랜드가 운영하는 하이원스키장이 들어앉은 산이다. 지난 시즌 잔뜩 스키어를 실어 나르던 곤돌라에 오르면 30분만에 스키장 꼭대기인 ‘마운틴탑’에 이른다. ‘제우스2’ 슬로프 오른편 가장자리로 산행이 시작된다. 고개를 돌리면 태백 준령이 발아래 물결 치는 모습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4월 말에 눈이 다 녹았다는 백운산자락. 서늘한 기운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열매를 매달고 있어야 할 나무는 이제야 새순의 신록을 퍼뜨리고 있다. 노란 산괴불주머니 무리를 지나 숲속으로 안내하는 오솔길의 윤곽은 좁고 희미하다. 사람의 발자국이 모여 길을 내는 법인데 이 길은 아직 충분한 발자국을 얻지 못했다.
숲속은 초록의 정령들이 머무는 공간. 뺨 위를 쓰다듬으면 초록이 묻어날 듯 싱그러움이 가득했다. 잘려진 나무등걸은 고운 이끼를 잔뜩 뒤집어 썼고, 그 옆으로 영연초 한 송이 새치름히 고개를 돌리고 서있다. 벌개덩굴, 노랑무늬붓꽃, 얼레지, 피나물들이 곳곳에서 무리지어 반기는 통에 걸음은 자꾸만 멈춰진다.
이제 막 피어나는 야생의 들꽃은 키가 작아 풀들 사이를 유심히 지켜봐야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몸을 숙이고 마음을 낮춰야 볼 수 있는, 생김새 만큼이나 고운 이름을 가지고 있는 토종의 우리 들꽃들. 고원으로 떠나는 꽃구경은 행복한 숲속의 보물찾기다.
꽃 하나 하나와 인사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백운산 정상. 앞으로 스키장이 뒤로는 하이원골프장이 내려다 보인다. 이곳에서 20분 정도 남쪽 산비탈을 내려오면 비포장 임도를 만난다. 예전 광부와 석탄을 실은 트럭들이 쉴새 없이 오가던 광산길, 산탄도로다. 정선군 함백에서 시작해 질운산(해발 1,172m), 두위봉(1,466m), 백운산(1,426m) 자락을 이으며 동쪽 태백 상장동에서 끝나는 150리 길이다.
가끔씩 나타나는 폐광의 흔적이 과거를 이야기할 뿐, 길은 깊은 숲속으로의 편안한 산책을 인도한다. 길가 세 군데에 꽃이 만발하는 습지가 있다. 옛 마을 터다. 집들이 있던 평평한 지역에 광산에서 흘러나온 물이 고여 이룬, 20~30년의 시간이 만들어낸 습지다. 길지 않은 그 시간 자연은 거추장스러운 인공을 모두 거둬내고 자기만의 꽃밭을 일구었다. 지금은 꽃밭 전체가 만개하기엔 이른 시기. 노란 동이나물만이 무리지어 피어 곧 모습을 드러낼 다른 꽃들을 기다리고 있다.
5km가량 휘파람을 불며 걸어 내려오면 길은 화절치와 사북을 잇는 좁은 임도를 만나 사거리를 이룬다. 이곳이 ‘화절령’ 혹은 ‘꽃끼끼재’라 불리는 고개다.
주위에 진달래 나무가 많아 봄이면 아낙들이 몰려들어 꽃을 꺾어댔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지는 꽃고개다. 꽃끼끼재 주위의 숲속은 들꽃의 보고(寶庫). 곧 피어날 은방울꽃 꽃대가 지금 막 올라오고 있다.
정선=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여행수첩/ 하이원스키장의 밸리콘도 外
● 강원 정선군 고한읍에 있는 하이원스키장의 밸리콘도에서 곤돌라를 타면 마운틴탑까지 오를 수 있다. 중간에 마운틴콘도에서 곤돌라를 한번 갈아타야 한다. 관광곤돌라 1만2,000원.
● 마운틴 탑에서 백운산 정상까지는 1.8km. 이 구간의 꽃길이 가장 아늑하고 꽃도 곱다. 길이 선명하지 못해 나뭇가지에 걸어놓은 산악회 리본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정상에서 산탄도로까지는 0.8km. 그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5.5km 걸으면 꽃끼끼재 사거리가 나타나고, 여기서 북쪽으로 내려오면 사북읍이다. 전체 걷는 데 3~4시간 걸린다.
● 이 코스로 들꽃여행을 떠나는 패키지 상품이 있다. 국내 트레킹 전문인 승우여행사의 ‘하이원 곤돌라 꽃끼끼재 들꽃보기’. 참가비는 일반 4만3,000원(어린이 3만9,000원). 26일, 6월 3, 9, 17, 23, 24일 오전 7시30분 서울에서 출발하는 당일 일정이다.
■ 고원 야생화는 꽃이 곱고 희귀종 많아
눈이 녹기 시작하면서 움트기 시작한 야생화는 가을의 서리가 내릴 때까지 계속 피어난다. 들꽃이야 주위의 야산에서도 쉽게 볼 수 있지만, 고원을 찾아가는 이유는 그 곳의 꽃이 유독 곱고, 또 쉽게 볼 수 없는 희귀종이 많기 때문이다.
백운산 인근의 분주령, 금대봉도 유명한 야생화 명소. 금대봉-분주령-검룡소 구간은 한계령풀, 대성쓴풀 등 희귀식물이 자라고 하늘다람쥐 등이 서식하고 있어 126만평 넓은 지역이 자연생태보전지역으로 지정돼 있다.
그만큼 때묻지 않은 야생의 땅이다. 하지만 쉽게 들어갈 수가 없다. 검룡소로 해서 분주령으로 오를 경우 태백국유림관리사무소의 허가를 미리 얻어와 하고, 두문동재에서 금대봉, 분주령으로 갈 경우 태백과 정선 국유림관리사무소 2곳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
눈꽃트레킹으로 유명한 대관령 인근의 선자령도 야생화가 곱다. 옛 영동고속도로변 대관령휴게소에서 출발한다. 대관령휴게소 뒤편에서 대관령 기상대, KT 중계소를 지나 한국공항공사 강원항공무선지표에서 산길을 따라 20분 정도 들어가면 화려한 꽃밭을 만난다. 음습한 나무 그늘 아래 샛노란 피나물꽃이 지천이고 얼레지, 바람꽃 등도 꽃사태 대열에 참여해 함께 아우성이다.
이성원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